나 자신을 알아가는 사람

by 박은석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를 때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가지를 걸으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서 얘기해봤는데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한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에라! 이 사람아! 너 자신이나 알아라!”라고 했나 보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발끈해서 소크라테스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에 대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하는 사람을 보면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지혜로운 사람은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봤을 것이다.

‘내가 누구지? 내가 누구라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하지?’

일단 이런 고민을 시작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테네에서는 소크라테스를 존경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소크라테스를 싫어하는 다수의 사람들로 나뉘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나에 대해서 제일 모르는 사람은 바로 ‘나’이다.

이게 무슨 말장난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내 얼굴에 대해서 내가 잘 알까?

식구들이 잘 알까?

그거야 당연히 내 얼굴을 많이 본 사람이 잘 안다.

그런데 내가 내 얼굴을 보는 시간은 고작 거울을 들여다볼 때뿐이다.

기껏해야 하루에 몇 분밖에 안 된다.

반면에 내 식구들은 적어도 하루에 몇 십분 많게는 몇 시간 내 얼굴을 본다.

같이 앉아서 밥을 먹을 때만 하더라도 내 얼굴을 꽤 오랫동안 본다.

당연히 나보다 내 얼굴을 더 잘 안다.


유명한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게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에 도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얼굴은 잘 그리면서도 자기 얼굴은 제대로 그리기가 어렵다.

알아야 그릴 텐데 모르는 걸 어떻게 그릴 수 있겠는가?

오죽했으면 자기 귀를 잘라버렸던 사람도 있지 않은가?




내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어보았는데 녹음기에서 다른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놈이 누구지?”

물어보았는데 옆에서 다들 나라고 했다.

나는 아니라고 내 목소리가 이렇지 않다고 했는데 친구들은 내 목소리가 맞다고 했다.


뉴스를 보면 그런 사람들이 등장한다.

영상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그 사람이 맞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고 생떼를 쓴다.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라고 한다.

보면서도 모르고 들으면서도 모르는 것이 자기 자신이다.


병원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본다.

분명히 통계수치가 나와 있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찍어놓은 사진이 훤히 놓여 있는데 그건 자기 몸이 아니라고 한다.

자기가 자기 몸을 잘 아는데 의사 선생님의 처방으로는 치료 효과가 없고 오히려 자기가 아는 방법으로 해야 치료가 된다며 되레 의사 선생님을 가르치는 사람도 있다.

하긴 뭐 공자 앞에서 훈수를 둔다는 사람도 있는데.




자기를 알아가는 것은 평생 계속해야 하는 숙제이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들과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들을 서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나와 오늘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내가 다를 수 있다.

아니, 다를 수밖에 없다.

시간과 상황이 달라지면 거기에 대처하는 나의 모습도 달라진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딱히 정할 수가 없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존재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플라벨(John H. Flavell)은 자신에 대한 인식 너머의 인식을 해보라며 ‘메타인지’라는 말을 제시했다.

자신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라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체크해보고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도 살펴보고, 이제껏 생각하지도 못했던 나의 가능성들도 발견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소크라테스가 그렇게나 찾고 싶었던 ‘나 자신을 알아가는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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