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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Jul 26. 2021

나이 들어도 시간을 천천히 가게 하는 비결


나만 그런 줄 알았다.

나이 들면서 시간이 빠르게 간다고 생각하는 거.

어렸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설날 떡국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고 해서 기왕이면 두 살 더 먹으려고 두 그릇을 먹었다.

그래도 시간은 느릿느릿 기어만 갔다.

“이놈의 달팽이 같은 시간아!” 호통을 쳐도 마찬가지였다.

어른이 되기에는 까마득했다.


어린 날의 풍경은 햇빛 가득한 운동장을 게으름 피우듯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놀이기구를 타려면 키가 어느 만큼 되어야 한다는 눈금자가 야속했다.

문지방에 올라 문설주에 뒤꿈치를 착 붙이고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1밀리미터만이라도 더 높이 선이 그어지기를 바랐다.

나이 제한을 둔 영화를 보고 싶어서 인상을 구기고 목소리를 굵게 해보기도 했다.

그랬다고 해서 나이가 더 들어가지는 않았다.

주민등록증을 받은 날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왔다.

나도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길고 길었던 열아홉 살까지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순풍에 돛 단 듯이 시간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20대 때는 사랑에 대한 열정과 인생에 대한 고민에 숱한 시간을 쏟아부었다.

군복무로 보낸 시간은 가기 전의 준비 기간과 전역 후의 회복 기간을 합쳐 족히 3년을 차지했다.

여기저기서 “와!

와!”하고 떠들어대는 사이에 훌쩍 7년이 지나갔다.

기형도의 시 <대학시절>처럼 졸업이었다.

그리고 나는 두려웠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통령 선거를 두 번은 했고 세 번째 투표용지를 쥘 날이 다가왔다.

그렇게 시간은 4년 단위로 달려가는 것 같았다.

스물여덟 살 때는 아직은 이팔청춘이라고 했다.

틀린 말도 아니다.

스물아홉 살에서는 시간이 잠시 멈춰주기를 바랐다.

굵직한 선 하나는 긋고서 서른으로 가고 싶었다.

그때부터 나이를 물어보면 살짝 주춤해졌다.

“만으로는”이라는 단서를 붙이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로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 만큼 급류를 탔다.

“응애”하고 태어난 갓난아기가 아장아장 걷더니만 금세 유치원 가방 메고 인사를 했다.

놀이공원의 숱한 기구들 중에서 오직 회전목마만 타고 왔던 아이였는데 몇 밤 자고 났더니 친구들끼리 놀이공원 간다고 했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 운동장에 올망졸망 모인 모습을 보고 흐뭇했는데, 수영장에 가면 아빠 등에 올라타서 어푸푸 어푸푸 물살을 가르게 했는데 이젠 다 커버렸다.


그렇게 스무 해 가까운 시간이 스윽 지나갔다.

뭐 해 놓은 것도 없는데 30대 40대의 나이가 사라졌다.

초보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으려고 했는데 가속페달을 밟게 되듯이 초보인생인 나도 열심히 가속페달만 밟고 있다.

한 번 올려놓은 발이 페달에 딱 달라붙었는데 떼어지지 않는다.

옆으로 산이 지나고 강이 지나는데 그 풍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고 있다.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끼는 이유는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린아이는 하루에 열 가지 사건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 아이에게 그 하루는 10가지의 사건으로 기억이 된다.

지긋지긋한 사건의 연속이라고 하면서 그날이 길게 느껴진다.

반면에 어른은 하루에 한 가지 사건도 터뜨리지 않는다.

그러면 어른의 그 하루는 기억할 게 없다.

‘통과! 통과!’이다.

그래서 시간이 빨리 지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모든 게 새로워서 “이게 뭐야?”라는 말을 남발하고 순간순간 탄성을 질렀는데 나이 들면서 “알아, 알아, 나도 알아!”라는 말로 일축해버린다.

“인생 뭐 새로운 거 있겠어?

다 거기서 거지지.”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시간의 브레이크가 파열되어 버린다.


나이 들어도 시간을 천천히 가게 할 수는 없을까?

있다!

자꾸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면 된다.

사고뭉치가 되면 시간이 천천히 갈 것이다.



                 

<대학시절> - 기형도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 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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