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존재가치가 가벼워질 때는 별을 본다

by 박은석


부지런히 일을 하다가도 가끔씩 ‘내가 여기서 얼마만큼 중요한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내가 없을 때 아쉬워할까?

이곳에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일까?

말로는 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속은 내가 없으면 더 좋다고 하지는 않을까?

손때가 묻은 책상과 의자, 매일 만나는 사람들, 어제와 별반 다름없는 오늘의 일거리,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인데 여기서 ‘나’라는 존재가 쏙 빠지더라도 아무런 이상이 없을 것만 같다.

‘나’ 대신 ‘다른 사람’이 나의 자리에 앉게 되더라도 탈이 날 일이 없다.

웬만한 일들에는 다 매뉴얼이 있고 그 매뉴얼대로만 하면 일은 굴러간다.

그러니 내가 없어진다고 해도 굳이 사람들이 아쉬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평가할 것 같다.

거대한 사회 구조 속의 부품 하나처럼 자신을 생각한다.

참 서글픈 현실이다.




농사를 지어 살 때에는 ‘농자지천하대본야(農者之天下大本也)’를 외칠 수 있었다.

농꾼이야말로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들을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말 뿐이었다.

실제는 농사꾼은 서글픈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직업 서열 상 두 번째에 해당되었지만 농사지어서 먹고살기는 힘들었다.

뭔가 먹고 살아갈 기술이 필요했다.


공장이 생긴다기에 공장에 가서 겨우겨우 기술을 익혔다.

이제 조금 살만해졌다고 여겼는데 공장에서 물건을 더 많이 만든다며 온갖 기계들을 도입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로부터 시작해서 공장마다 컨베이어벨트가 도입되었다.

일의 분업화라는 명목은 좋았다.

사람들을 늘어세우고 각자 자기 자리에서 한 가지 일만 하게 했다.

작업은 빨라졌고 그만큼 물건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사람도 점점 물건처럼 숫자로 불리게 되었다.

34번 볼트, 57번 너트가 곧 그 사람이 되었다.




찰리 채플린은 영화 <모던 타임즈>를 통해서 과연 이런 시대에 사람의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주었다.

하루 종일 볼트를 조이는 작업자는 컨베이어벨트의 속도가 빨라지자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자신이 조여야 할 볼트는 많은데 그것을 다 조이지 못했다는 괴로움 때문인지 나중에는 무엇이든 다 조이려고 하는 병적인 증세까지 보인다.

채플린의 연기에 빠져서 즐겁게 웃지만 그 웃음의 뒤끝이 개운치 않았다.

기계의 일부분이 되다시피 하다가 완전히 망가져버리는 한 사람의 모습이 마치 나의 모습인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과연 나의 가치와 존재감은 어느 정도의 무게가 있을까?

밀란 쿤데라의 책 제목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일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얼굴 표정은 다 좋은 척 밝게 한다.

사람들에게 나의 본심을 들키는 게 싫고 내가 가볍게 여겨지는 게 싫기 때문이다.




시골에 살 때는 이런 마음이 드는 밤이면 밖으로 나갔다.

캄캄한 세상일수록 별빛은 더 밝았다.

김광섭의 <저녁에>라는 시를 많이 읊조렸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별 하나는 태양보다 훨씬 크다.

태양은 또 지구보다 훨씬 크다.

지구보다 109배나 크다고 한다.

지구는 얼마나 큰지 내 상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하여간 크다.

그런데 지구보다도 태양보다도 더 큰 별이 나를 내려다본다.

내가 뭐라고, 무슨 가치가 있다고 저 별은 나를 쳐다보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내리지 못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녁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내가 한없이 중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그랬다.

오늘 다시 내 존재가치가 가벼워진다고 생각이 들면 밖에 나가서 별을 봐야겠다.

어쩌면 밤하늘의 별을 못 봐서 내가 가벼워진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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