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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Aug 14. 2021

수레바퀴 아래서 마음을 다스린다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일은 거의 없다.

시험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읽는데 기왕이면 안 읽었던 책을 고른다.

그러던 내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집어 들었다.

중학생 때인가 고등학생 때인가 읽었던 책이다.

이상하게도 헤르만 헤세라는 이름이 떠오르면 이 책이 생각난다.

아마 사춘기 시절 달달한 연애감정이 막 싹트기 시작할 때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는 <수레바퀴 밑에서>라고 이름 붙인 책으로 본 것 같다.

수레바퀴 아래서나 수레바퀴 밑에서나 그 말이 그 말이지만 내 첫 만남인 수레바퀴 밑에서가 더 정감이 간다.

하고 많은 헤르만 헤세 책 중에서 왜 그 책을 골랐는지 모르겠다.

아마 물레방앗간에서의 하룻밤을 모티브로 한 <메밀꽃 필 무렵> 같은 느낌이 아닐까 해서 골랐을 것이다.

물레방아나 수레바퀴나 생긴 모습이 동그란 게 비슷하니까 말이다.




그때 햇살이 따사로운 나른한 날의 수업시간이었다.

책상 밑 내 무릎 위에 책을 살짝 올려놓고 선생님 눈치를 살피며 몰래몰래 읽었다.

책 내용보다도 선생님께 들키면 안 된다는 긴장감이 더욱 컸었다.

그랬기에 책을 다 읽고서도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내 기억의 조각 중에는 주인공이 수레바퀴 아래에 드러누워서 짝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며 야릇한 사랑의 감정을 꿈꾸는 장면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 책 <수레바퀴 아래서>는 나에게 사춘기 시절의 연애소설로 각인되어 있었다.


누군가 헤르만 헤세 이야기를 하면 나도 그 사람을 안다고 그 사람이 쓴 책을 읽어봤다고 하면서 으스댔다.

그런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10년, 20년, 30년을 넘게 살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옛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읽어보기로 했다.

물론 가장 큰 관심은 주인공이 수레바퀴 아래에 언제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책 내용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성장소설이 그렇듯이 ‘아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하는 기분이 계속 솟아났다.

책의 끝부분까지 거의 다 다다랐는데 이상하게도 수레바퀴가 나오지 않았다.

‘아, 뒷부분에 나오는구나!’ 생각했다.

마침 주인공이 밤늦게 집에 돌아가는 장면이 나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결말이 너무 충격적으로 끝났다.

주인공이 강물에 빠져 죽었다.

내가 그토록 찾았던 수레바퀴는 보이지도 않고 말이다.


내가 빨리 읽느라 미처 보지 못했나 싶어서 책을 다시 들추며 수레바퀴라는 단어가 나온 페이지를 찾았다.

두 군데 나왔는데 하나는 ‘너 그렇게 살다가는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는 인생이 된다.’라는 선생님의 충고의 말씀이고 또 한 군데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가 수레바퀴에 살짝 스친 달팽이처럼 움츠러들었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수레바퀴 아래서의 로맨스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내가 안다고 했었던 <수레바퀴 아래서>는 다른 책이었나? 도대체 나는 뭘 읽었던 것일까? 읽으면서 딴생각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책과 혼동한 것일까? 갖가지 상념이 스쳐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안다고 확신하는 것이 어쩌면 잘못된 정보들의 조합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비단 책만의 일이 아니다.

살아오면서 내가 안다고 자부했던 것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적이 너무나 많다.

나 혼자만 손해를 보면 그나마 다행인데 내 잘못된 기억과 지식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다.

언젠가 한 번은 누군가 나에게 길을 물어봤을 때 확신에 차서 알려줬는데 엉뚱한 길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었기에 아직까지 미안하다는 말도 못 했다.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한다.

아는 척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마음속 수레바퀴 아래에 들어가서 조금만 더 생각하고 나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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