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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벅찬 오늘 하루
몸을 숙인 그곳에 나의 비밀이 있다
by
박은석
Aug 2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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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이 영글수록 이삭은 고개를 숙인다.
사람도 나이를 더해가면서 자세를 숙인다.
단순히 허리가 약해져서 몸을 숙이는 게 아니다.
사람은 직립보행을 하기 때문에 몸을 숙이는 것보다 꼿꼿하게 서는 게 더 자연스럽다.
몸을 숙이는 것은 불편하다.
기분도 상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서로가 상대방의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서 위상이 달라진다.
서로 얼굴을 들고 눈과 눈이 마주칠 수 있다면 동등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눈을 내리깔아서 상대방의 머리나 등을 내려다본다면 상대방보다 높은 위치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반대로 얼굴을 들지 못하고 상대방의 얼굴보다 아래쪽을 바라본다면 상대방보다 자신이 낮은 위치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 날 혈기왕성할 때는 고개 숙이기를 싫어한다.
상대방 앞에 허리를 굽히고 몸을 숙이는 것을 굉장한 치욕으로 여긴다.
하지만 나이가 더해 가면서 점점 몸을 숙이게 된다.
몸을 숙이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행동인데 무턱대고 아무 상황에서나 아무에게나 숙일 수는 없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몸을 숙이려면 그에 맞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숙여야 하는 경우도 있고 자발적으로 좋아서 몸을 숙이는 경우도 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 앞에서 저절로 몸을 숙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그보다 약하고 부족하고 어리기 때문에 숙인다.
하지만 내가 더 강하고 넉넉하고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몸을 숙일 때가 있다.
그때는 내가 좋아서 숙이는 것이다.
손주 앞에 몸을 숙이는 할아버지도 있고, 자기보다 나이 어린 직원에게 고개를 숙이는 사장님도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그 사람이 몸을 숙일 때 당황한다.
몸 둘 바를 몰라 손사래를 치기도 하고 그보다 더 낮게 몸을 숙이기도 한다.
몸을 숙인다고 해서 다 낮은 위치의 사람인 것은 아니다.
꼿꼿하게 쭉 뻗은 몸은 보기에 좋다.
한눈에 전체가 들어온다.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기운이 전해진다.
숨기고 감추고 할 것도 없다.
다 드러내려고 한다.
하지만 숙인 몸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
꺾이는 곳에 비밀스러운 틈이 있어 보인다.
그곳에 무엇인가 감춰져 있다.
남들이 모르는 그 사람만의 비밀이 숨겨있다.
굽은 길에 사연이 없는 곳은 없다.
어쩌다가 꺾였는지 분명 이유가 있다.
숙인 몸 굽은 몸의 가락 가락을 가리키면서 왜 그렇게 되었냐고 물어보라.
그러면 소설 한 권도 넘는 이야기들이 쏟아질 것이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그 사람만의 비밀이 밖으로 드러나고 그 사람만의 보물이 쏟아질 것이다.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는 이런 비밀이 나이를 더해가면서 몸의 곳곳에 숨겨지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하나씩 꺼내보는 재미가 있다.
‘그때는 그랬지!’라며 찬란한 보물을 바라보는 맛이 있다.
청춘의 곧은 몸에는 눈길이 많이 가지만 노년의 굽은 몸에는 마음이 많이 간다.
그래서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다.
그러나 노년의 굽은 몸 곳곳에는 구비 구비 비밀이 많이 있다.
비밀을 감추고 보물을 숨겨야 하기 때문에 사람은 나이를 더해가면서 몸을 숙이는 것이다.
이 사실을 몰랐을 때는 몸을 숙이려 하지 않았다.
핏대를 올리며 꼿꼿하게 서려고만 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맞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세상이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꼿꼿하면 꺾인다는 경험도 했다.
내가 틀렸고 다른 사람이 맞았다는 일도 겪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몸을 숙이게 되었다.
나만의 비밀을 발견한 것이다.
나만의 보물을 숨길 수 있는 공간을 찾아낸 것이다.
몸을 숙인 곳에 나의 비밀이 있다.
그곳에 내 인생의 보물을 숨겨놓았다.
"몸을 숙이느라 꺾인 그곳이 나의 보물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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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석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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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2009년 1년 200권 읽기 운동 시작. 2021년부터 1년 300권 읽기 운동으로 상향 . 하루에 칼럼 한 편 쓰기. 책과 삶에서 얻은 교훈을 글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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