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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질로 시작한 일이 유용하게 쓰인다
by
박은석
Oct 1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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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4층 빌라는 지은 지 꽤 오래되어서 여기저기 나이 든 티가 난다.
지을 때는 괜찮은 건축자재들을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25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녹이 슬고 낡았다.
관리사무소에서도 나름대로 잘 관리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여력이 부족해 보인다.
고작 100세대 조금 넘게 살고 있으니 관리소장 한 명, 경리아가씨 한 명, 경비아저씨 두 명이 관리하고 있다.
경비아저씨 두 분은 연세가 지긋하시다.
주 업무는 건물 경비와 쓰레기 분리배출이다.
관리소장은 자격증을 몇 개는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전기, 수도, 보일러에 대한 지식과 경험도 있다.
그래도 전문 기술자는 아니니까 뭐가 망가지면 관련업체에 연결해서 고치도록 한다.
주민인 입장에서는 조금 불편하다.
세대수가 많은 아파트처럼 전기기사나 수도 보일러 기사가 있으면 좋겠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다.
불편을 감수하면서 사는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지랖이 넓은 나 같은 사람이 나서게 되는 일들이 생긴다.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쳐도 된다.
그런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한 달쯤 전엔가 경비실에서 각 세대에 공지사항을 전달하는데 집에서 들으면 스피커의 소리가 너무 작았다.
경비실에 들러서 소리가 작다고 했더니 기계가 오래되어서 그런 것 같다고만 했다.
이해가 안 되었다.
마이크가 앰프에 연결되어 있고 앰프에서 각 가정의 스피커로 소리가 전달된다.
앰프에서 볼륨을 높이면 소리가 크게 날 텐데 그걸 모르시는 것 같았다.
참다 참다 양해를 구하고 경비실에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볼륨 스위치가 너무 낮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스위치를 올리면서 이러면 훨씬 나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이런 걸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아저씨의 질문에 으쓱해졌다.
어렸을 적에 교회에서 마이크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엊그제는 계단의 점멸등이 너무 어두워 보였다.
늘 그 정도의 밝기였지만 그날따라 눈엣가시처럼 거슬렀다.
특히 우리 집 앞의 불빛은 더 어둡게 느껴졌다.
바꿔버리자 마음먹었다.
다행히 집에 전구가 있었다.
의자를 밟고 올라가 전등 뚜껑을 열었다.
투명 백열등이었다.
조심스레 빼어서 살펴보았다.
30촉(30W)이다.
촛불 서른 개의 불빛.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갑자기 반가웠다.
어렸을 적 30촉 다마(전구)를 갈아 끼우시던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없을 때 나도 아버지를 따라서 30촉 다마를 빼었다 끼웠다 장난질을 해 보았었다.
그때의 그 30촉 전구이다.
30촉 전구는 대학시절 교수님께서 뒤풀이 자리에서 즐겨 부르셨던 노래에도 등장한다.
30촉 백열등이 그네를 탄다고 열창을 하셨다.
전구를 갈아 끼우면서 나도 몰래 “그네를 탄다 아아~” 흥얼거리고 있었다.
내친김에 아래층 전구도 바꿔버렸다.
세상 훤하게 밝아졌다.
전기는 무서운 거니까 만지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장난삼아 뜯어보고 만져보았다.
감전될 뻔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야말로 ‘앗 뜨!’였다.
그 장난질들이 이어지면서 얼떨결에 실력이 되었다.
사람이 만든 것은 사람이 고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렇게도 만져보고 저렇게도 만져보았다.
그러다 보니까 웬만한 것들은 스스로 손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자격증 같은 것은 없다.
기술자가 아니어서 좀 엉성하기는 하다.
그래도 쓸 만하다.
이렇게 오지랖을 떤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냥 기분이 좋다.
답답했던 것이 뻥 뚫린 기분이다.
경비실에서 알려주는 공지사항이 귀에 들리는 게 기분이 좋다.
계단을 내려갈 때 환하게 켜지는 불빛을 보니 기분이 좋다.
누가 알겠나?
평생 직업이 없는 시대인데 나중에 내가 관리사무소 같은 데서 일하게 될지.
장난질로 시작한 일들이 언젠가는 유용하게 쓰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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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석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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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2009년 1년 200권 읽기 운동 시작. 2021년부터 1년 300권 읽기 운동으로 상향 . 하루에 칼럼 한 편 쓰기. 책과 삶에서 얻은 교훈을 글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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