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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들에 대한 예찬
by
박은석
Oct 2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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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랫동안 사용했다.
낡은 티가 여기저기 보인다.
색이 바랬고 먼지가 앉아 있고 성능도 떨어졌다.
새것으로 바꿀 때가 되었다.
아니 진작부터 새것으로 바꿨어도 되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사용해보자고 했다.
부품 하나만 바꾸면 되니까 그게 더 경제적이라고 했다.
역시 살짝 손을 봤더니 잘 돌아갔다.
그렇게 또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다.
또 다른 불협화음이 들렸다.
이번엔 또 다른 부품을 바꾸면 되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하는 심정으로 또 부품을 바꾸고 사용했다.
그렇게 하나씩 바꾸는 동안에 겉껍데기는 누렇게 탈색이 되어갔다.
하지만 안에는 깨끗한 새 부품들이 차곡차곡 늘어갔다.
저것 하나에 투자한 정성이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물건 하나하나에 정이 들었다.
새것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배웠는데 새것들을 낡은 부대에 담아놓은 기분이다.
하기는 속은 모르지만 껍데기는 손때 묻은 낡은 것이 편하다.
생명도 없고 감정도 없는 물건들일지라도 일단 한번 정이 들면 정 값을 톡톡히 한다.
필요 없다며 내다 버리기가 쉽지 않다.
두고 보면 쓸 때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고이 모셔둔다.
사실은 알고 있다.
쓸 때가 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다.
그렇지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정 때문이다.
저 녀석과 함께 지내온 시간들은 숫자로만 표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시간 안에 우리의 인생이 녹아 있다.
아이들의 성장 과정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가정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사연들이 담겨 있다.
남들에게는 그냥 오래된 물건이겠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가정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존재이다.
익숙한 것, 눈 감고도 그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피해서 우리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우리의 자리를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것들이다.
옷장, 책상, 컴퓨터, 냉장고, 세탁기, 시계들 모두가 그렇다.
싹 바꾸고 새것으로 장만하고 싶은데 이것들을 떠나보낼 때면 마음에서 회오리바람이 일 것 같다.
언젠가는 그 바람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도 알고 있다.
일단 지금은 아니라고 마음으로 말을 한다.
얼마 전에 아내가 하는 말이 있었다.
결혼해서 옷장을 두 번 바꾸면 그것이 한 인생이라고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았다.
옷장 두 번 바꾸면 인생이 지나간다.
옷장만 그러겠는가?
책상도, 냉장고도, 세탁기도 두어 번 바꾸면 한 인생이 지난다.
그러니까 그 녀석들은 적어도 내 인생의 3분의 1 정도를 나와 함께 지낸다는 말이다.
만만치 않은 시간이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고 하면서 십년지기라고 소개하면 굉장히 친한 친구처럼 여겨진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하는 시간이다.
아니, 요즘은 강산이 바뀌는 시간이 2~3년이면 족하다.
강이 바뀌고 산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내 곁을 지키고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
아주 오래되면 골동품의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그런 걸 바라지 않더라도 그냥 두고 싶은 것들이 있다.
바꾸기 싫은 것들이 있다.
오래되어서 정이 들고 편한 것이다.
손에 익숙한 것이다.
자주 들여다보는 것이다.
사람도 오래된 사람이 편하고 물건도 오래된 것이 편하다.
나태주 선생의 노래처럼 오래 보아야 예쁜 것들이 있다.
그게 나일 수도 있고 너일 수도 있고 내가 가진 물건일 수도 있고 네가 가진 물건일 수도 있다.
자고나면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져서 우리 눈앞에 쏟아지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 새로운 것이 없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 된다는 선전 광고를 보고 들으며 산다.
남들이 새것을 구입하고 바꾸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백설이 만건곤할 때일수록 낙락장송이 더 뚜렷이 보인다.
오래된 것들이 그런 것들 아닐까?
오래되어서 더욱 좋은 것들이다.
그런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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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석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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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2009년 1년 200권 읽기 운동 시작. 2021년부터 1년 300권 읽기 운동으로 상향 . 하루에 칼럼 한 편 쓰기. 책과 삶에서 얻은 교훈을 글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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