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꺾이지만 바람으로 다시 일어선다

by 박은석


늦가을 바람에 나뭇잎이 후드득 떨어진다.

바닥에 누운 낙엽들이 데구루루 굴러간다.

바람은 가지 끝에 몇 남지 않은 이파리에게도 인정사정없다.

마지막 잎새에게도 매몰차다.

다 떨어져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바람 한 번 불고 지나가면 나뭇가지는 더 휑하니 비어버리고 바닥에는 낙엽이 한 꺼풀 더 쌓인다.

저 낙엽이 나뭇가지에 붙어 있을 때는 바람 한 번 불 때마다 나무를 춤추게 했었다.

나무 아래 시원한 그늘을 만들었었다.

그때는 바람이 불어오기를 고대하고 기다렸다.

어디서 바람이 한 점 불어오면 그쪽으로 얼굴을 돌렸었다.

맞바람을 맞으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시원했고 상쾌했고 속이 후련했다.

그랬던 바람이었는데 이제는 바람이 불어오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

시원하다는 마음보다 차갑다는 마음이 더 앞선다.

사정없이 나뭇잎을 떨어뜨릴 바람이다.

앙상한 가지를 더 시퍼렇게 만들어갈 바람이다.




바람이 나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자기도 그냥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이쪽으로 불었다가 저쪽으로 부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바람을 맞는 내 마음은 다르다.

어떤 때는 내 마음을 만족시켜주는 것 같고 어떤 때는 나에게 못된 짓을 하는 것 같다.

바람이 불기에 꽃이 피고 그 꽃의 수술들이 여행을 떠나 암술을 만나 새살림을 시작한다.

거기에서 또 씨가 맺히고 싹이 나고 줄기가 뻗고 이파리와 꽃과 열매가 맺힌다.

바람 때문에 성장하고 번성하게 된다.

하지만 바람 때문에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고 한창때의 꽃잎이 떨어진다.

그 유연한 가지가 꺾이기도 하고 그 튼튼한 줄기가 우지끈 부러지기도 한다.

심지어 땅속에 묻힌 뿌리가 홀라당 뽑혀 하늘을 향해 항복을 고하기도 한다.

바람 한 번에 멀쩡했던 나무가 상하고 온 국토가 쑥대밭이 되기도 한다.

바람 한 번 잘못 만나면 그 길로 패망할 수 있다.




바람 한 점 없다며 조용하고 평안하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큰 바람이 불기 전에는 조용한 시간이 있다.

태풍의 눈에 들어오면 조용하다.

바람 한 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태풍의 눈이 옆으로 살짝만 틀면 그 순간 엄청난 바람이 몰려온다.

그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아끼는 것들은 동아줄로 꽁꽁 묶어놓아야 한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바다에서 부는 바람은 다 좋은 바람이고 고마운 바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두 팔 벌려서 환영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바람이 불 때 그 바람을 피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

무조건 환영할 바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때 피하지 못하면 극심한 손해를 볼 수 있다.

바람은 그렇게 나에게 불어와서 나에게 있는 모든 것들을 날려버릴 수 있다.

바람 한 번에 삶이 망가진 사람을 찾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모두 다 바람에 무너지고 꺾인 사람들이다.




무너지고 꺾인 상태에서는 스스로 일어설 수가 없다.

누군가 으켜주어야 한다.

그때 나를 일으키는 것도 바람이다.

바람이 불기에 쓰러지는 것도 배우고 옆으로 눕는 것도, 다시 일어서는 것도 배운다.

내 인생에 왜 이렇게 모진 바람이 많이 부냐고 한탄할 필요는 없다.

불평하고 한탄해봤자 얻는 게 없다.

자신에게 몰아닥치는 바람을 피할 바람막이도 없다.

앞에서 바람이 불면 얼굴로 맞서고, 뒤에서 바람이 불면 뒤통수로 막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바람 때문에 더욱 단단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미당 서정주 선생의 <자화상>이라는 시를 보면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라고 한다.

인생의 바람은 따뜻한 봄바람 같다가도 아프고 매서운 겨울바람이 되기도 한다.

그런 바람을 맞으면서 이만큼 성장했다.

앞으로도 우리는 날마다 바람에 꺾이지만 바람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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