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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Nov 28. 2021

매일 잊어버리지만 매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한문을 공부할 때 마음에 확 와닿은 말이 여럿 있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고진감래(苦盡甘來),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배우라는 온고지신(溫故知新), 쪽에서 뽑은 푸른 물감이 쪽빛보다 더 푸른 것처럼 스승보다 더 위대한 제자가 되라는 청출어람(靑出於藍) 같은 말들은 공책 한 편에 적어놓고 외웠다.

그중에서 내 마음에 오랫동안 간직하는 말은 매일 새롭게 살자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다.

몇 해 전에 붓글씨 잘 쓰시는 분에게 부탁해서 한 장 받아두기도 했다.

날마다 새롭게 살자는 이 말은 구호로 외치기에도 좋았다.

새날 새아침이니까 새롭게 시작하자고 했다.

묵은 앙금은 잊고 새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자는 말로도 해석하였다.

어제 실수했다면 오늘은 실수하지 말자고 다짐하기에도 좋은 말이다.

책상 위에 올려두고 그 글을 바라보면서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어떻게 해야 날마다 새로운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이 좋다고 말들을 많이 하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은 방법은 어제까지의 기억을 싹 잊어버리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백짓장처럼 하얘진 머리에 그날그날 새로운 기록을 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잊어버리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런 면에서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도 있겠다.

망각의 삶이 꼭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잘 기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기억이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을 곱씹으며 사는 것이 인생의 낙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기억이 지워지는 사람을 바라본다면 인생의 낙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며 불쌍히 여길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 지워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지난날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불행의 요소라고 할 수도 없다.

그에게는 이미 슬프고 아팠던 기억 자체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치조 미사키라는 일본 작가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라는 소설에서 대담하게도 선행성기억상실증을 앓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집안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은데 그만 사고로 기억력을 잃었다.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 그리고 아주 친한 친구 하나만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소녀는 매일 자신이 겪는 일들을 사진과 영상으로 찍고 일기에 기록한다.

그리고 다음날 일어나면 그렇게 정리한 내용을 읽고서 집을 나선다.

그게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는 방법이었다.

이런 사람도 누구를 만나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겠지?

둘이 사귀기로 했는데 하루 후에 만나서는 “당신은 누구신가요?”라고 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사귀자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작가는 이런 사람에게도 사랑이 찾아온다고 보았다.




망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 사랑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건 매일 새롭게 사랑해야 한다.

마치 이 사람을 오늘 처음 만난 것처럼, 처음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기에 분명 슬픔을 안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슬픔조차 느낄 수가 없다.

천진무구하게도 아침에 일어나면 새로운 하루를 살아간다.

시간이 흘러 주인공은 기억상실증을 극복한다.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기억력이 돌아오고 나니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이제 그 사람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아픔과 슬픔이 밀려왔다.

기억력을 회복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억력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매일 새로운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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