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깨끗이 끝난 시간이 아니다

by 박은석


간밤에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쳤다.

그러잖아도 힘을 잃고 간신히 붙어 있던 나뭇잎들이 후드득 땅으로 쏟아졌다.

아침이 밝았을 때 나뭇가지에는 마지막 잎새들 몇 개만 위태롭게 달려 있었다.

저 잎새들도 조만간 하나씩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도 한 살이 끝날 것이다.

그리고는 또 새로운 한 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살아온 한 살과 살아갈 한 살이 마주치는 분기점이 되는 시기가 바로 지금 12월이다.

지나간 열한 달이 흐릿하게 기억난다.

이제 다시 시작이라며 마음을 먹었던 일들이 있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맞는 말이라고 증명하듯이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

파릇파릇했던 봄날의 싱그러움을 지나 끈적지근한 땀을 흘리던 여름날의 무더위도 보냈다.

그리고 파란 하늘 아래 누렇게 물들은 벌판을 바라보았던 가을날의 다사로움이 있었다.

그 시간들을 지나 이제 나뭇잎들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모래사장에 손으로 멋진 그림을 그려놓으면 바람이 파도를 한 번 밀어댄다.

그러면 그 멋있던 그림이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모래사장은 내가 오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깨끗해진다.

그 바람이 이제는 나무를 밀어댄다.

바람 한 번 밀어댈 때마다 가지 하나가 깨끗해진다.

그리고 곧 나무도 가로수길도 세상도 깨끗해진다.

그렇게 깨끗해진 화판 위에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어제까지의 기억을 살려서 비슷한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어제까지와 비슷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어제까지의 기억을 떠올려서 그 그림과는 다른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모험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어떤 그림이 좋을까? 어제까지와 비슷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그림을 좋아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다.




지난해에는 지난해의 그림을 남기고 이번 해에는 이번 해의 그림을 남긴다.

어떤 그림은 걸작으로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어떤 그림은 남이 볼까 민망하기도 할 것이다.

유명 화가라고 해서 다 걸작만 남기지는 않았다.

그들도 스승의 그림을 베꼈던 적이 있고, 스케치만 하다가 쓰레기통에 버린 그림도 있었다.

공들여 그린 그림이지만 아무에게도 눈길을 받지 못한 그림도 있다.

인상파의 문을 연 모네도 자신의 그림 <해돋이:인상>을 본 평론가가 “그것 참 인상적이네!”라며 비아냥거리던 소리를 들었다.

그 말 한마디에 열 받아서 붓을 던져버렸다면 큰일 날 뻔했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나는 내 그림을 그리겠다는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그렸더니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불경에서 따온 말이지만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책 제목처럼 나의 길을 가면 되고 나의 그림을 그리면 된다.

그것으로 만족하자.




모래사장에 바람이 불어 파도가 밀려올 때가 되었다.

나뭇가지에도 바람이 일렁거려 나뭇잎을 떨구려고 마구 흔들어댈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모래 위에 그림이 그려져 있고 나뭇가지에 잎새가 달려 있다.

올해의 그림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조금 더 그리고 색칠해야 한다.

붓을 놓을 때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있다.

마지막 한 점을 찍는 붓 터치가 이루어져야 끝이 난다.

지난 열한 달의 그림이 형편없는 것처럼 보여도 괜찮다.

스케치만 했다고 해서 실패한 게 아니다.

어떤 그림은 색칠보다 스케치가 더 어려울 수 있다.

실수로 물감을 쏟아버렸는데 그 덕택에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추상화가 탄생할 수도 있다.

그림 그리는 데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

남이 타다 버린 자전거도 화장실 변기도 훌륭한 작품이 된다.

망친 그림도 그 위에 덧칠하면 된다.

지금은 깨끗이 끝난 시간이 아니다.

깨끗한 곳에 다시 그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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