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광복절 어간에 방영한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대한독립군 장군 홍범도의 유해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서 대전 현충원으로 모셔오는 영상이었다.
이름에 걸맞게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장군의 귀환>이다.
이런 영상은 다운받아서 고이 간직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차마 영상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다큐멘터리의 내용이 추측되었다.
내 감성에 그 영상을 보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파일만 다운받아놓고서는 몇 달을 보관했다.
오늘 마음을 다잡고 영상을 보기로 했다.
과연 내가 생각했던 대로이다.
맨정신으로는 볼 수 없었다.
영화배우 조진웅씨의 물기어린 목소리로 다큐멘터리가 해설되었다.
홍범도!
1868년 평양의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
산후열 때문인지 어머니는 장군을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아홉 살이 되었을 때는 아버지마저 운명을 달리하셨다.
하늘은 그에게 참 무심하셨다.
열다섯 살에 나이를 두 살 속여서 군에 입대하였는데 군인들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모습을 보고 견디기 힘들어하셨다.
금강산의 어느 절에 들어가서 세상을 등지고 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 다시 속세로 내려왔다.
처가인 함경도에 정착하여 호랑이 잡는 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아들도 둘을 낳았다.
평화로운 때였다.
그러나 나라는 기울 대로 기울어서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힘없는 나라의 무지한 백성들은 어떻게 할 줄도 모르고 운명이 자기 목을 죌 때까지 넋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홍범도는 자기처럼 총을 조금이라도 쏠 줄 아는 포수라면 일제에 대항해 싸우자고 하였다.
김좌진 장군과 함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독립투사들이 일제의 군사들과 싸워서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범을 잡던 사냥꾼 홍범도가 일본군을 잡는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일본의 눈치를 보던 러시아는 1937년에 연해주에 있던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20만 명 넘는 조선인들이 열차에 실려갔다.
숱하게 많은 사람이 굶주림과 추위로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가까스로 중앙아시아에 도착한 조선 사람들은 그 지역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끈질기게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그곳을 개간하여 벼농사 곡창지대로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그들을 ‘고려인’이라고 불렀다.
홍범도 장군도 그 가운데 있었다.
혁혁한 독립군 장군이었지만 동네 아저씨처럼, 허름한 극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노인처럼 살았다.
그러나 틈만 나면 젊은이들에게 독립심을 일깨워주었다.
국토를 회복하여 자손만대에 행복을 주는 것이 독립군의 목적이요 민족을 위한 본의라고 하였다.
해방이 되면 고국으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해방 2년 전에 카자흐스탄에서 눈을 감았다.
78년이 지나서 장군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오게 되었다.
한참이나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모셔올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영상을 보는 내내 눈물이 흘렀다.
참으려고 했지만 참을 수 없었다.
이럴 줄 알고 파일을 다운받은 후에 이제껏 보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애국자나 민족주의자이기 때문에 눈물이 나고 감정이 동하는 것이 아니다.
장군의 헌신이 너무나 고마웠기 때문이다.
장군의 아내와 큰아들은 일제의 고문을 못 이겨 목숨을 잃었다.
작은아들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모진 질병으로 산화했다.
후에 연해주에서 재혼하여 딸 셋을 낳았지만 가족들과 생이별을 했다.
너무나 안타깝다.
어찌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실컷 울었다.
소리 없이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식구들에게 눈물 흘리는 남편과 아빠의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눈물을 닦고 생각해보니 장군에게는 5천만 명이라는 대한민국의 아들딸들이 있었다.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