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를 보면서 드리는 기도

by 박은석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하기도 하지만 걱정되기도 한다.

품 안의 자식일 때는 부모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으니까 부모가 조심하면 된다.

그러나 부모의 품을 떠날 나이가 되면 아이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해야 한다.

더 이상 부모가 도와줄 수 없는 영역이 생긴다.

아이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

잘되어야 하는데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 수밖에 없다.

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람일 뿐이다.

마음 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도종환 시인의 노래처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다.

이 세상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듯이 내 아이도 상처받으면서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그러니까 상처받는 것도 커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내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이를 향한 부모의 소망은 복잡하지가 않다.

짧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아프지 말았으면 좋겠다.

몸도 마음도.’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면 좋겠다.’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몇 글자 안 되는 글이어서 쓰는 것은 10초도 안 걸린다.

그런데 참, 이게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괜찮다 싶으면 어디가 아프다고 한다.

몸이든 마음이든 아니면 둘 다이든.

아파하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도 역시 아프다.

원하는 바가 있어서 노력하는 자식을 보는 부모는 날마다 손을 비벼대며 빈다.

그런데 목표는 달성하기 직전에 저 앞으로 달아나버린다.

늘 목표 앞에서 미끄러진다.

자녀에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라고 말은 하는데 그 뒷바라지를 누가 할 것이냐는 말을 들으면 대답할 수가 없다.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부모만큼 잘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학교 숙제라면 부모가 대신해줄 수라도 있는데 인생 숙제는 부모가 대신해줄 수가 없다.

아이가 스스로 해나가야 한다.

옆에서 가르쳐주고 지도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수많은 방법 중 하나의 샘플일 뿐이다.

부모의 인생에서는 그런 방법이 통했는데 아이의 인생에서는 전혀 들어맞지 않을 수 있다.

이 정도 보살폈으니 이제는 맘껏 달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자녀의 삶이 마치 고속도로에 들어선 것처럼 쫙 펴진 것처럼 보일 때 말이다.

그런데 곧게 뻗은 길에도 온갖 위험 요소들이 숨어 있다.

잘 달리다가 바퀴가 펑크난다든지 뭐 하나 고장이 나면 갓길에 서야만 한다.

달리는 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이 내 아이는 아닐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가 없다.

가끔은 휴게소에 들러서 쉬기도 해야 한다.

긴긴 거리를 가려면 달릴 때와 쉴 때를 적절히 나눠서 지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 탈이 난다.




멀리 가려면 누군가와 함께 가는 것이 좋다.

혼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혼자 가는 길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내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갈 것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부모인 내가 아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머지않아 아이가 어른이 되어 결혼할 때는 내가 손을 풀고 내 아이의 손을 새로운 사람에게 넘겨줄 것이다.

잘 부탁한다면서 말이다.

바통을 터치하는 순간이다.

그러면 아이는 그 이와 손을 잡고 내가 보는 앞에서 달려갈 것이다.

그리고 또 한참 시간이 지나면 이번에는 내 아이의 아이들이 내 아이의 손을 잡아줄 것이다.

그렇게 내 아이는 사람을 만나고 만나면서 사람과 함께 멀리 나아갈 것이다.

잘 만난 사람 때문에 이쪽으로 기울었다가 만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 같은 사람 때문에 저쪽으로 기울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흔들리고 흔들리며 내 아이는 인생의 꽃을 피울 것이다.

나는 그렇게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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