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은석 Feb 22. 2022

오래전에 갔었던 장소에 다시 들렀을 때


오래전에 갔었던 장소에 다시 들르면 잊고 있던 예전 기억이 살아난다.

엄밀하게 말하면 잊고 있었던 게 아니라 기억의 창고에서 끄집어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굳게 닫혔던 창고의 문이 그 장소에 도착하는 순간 활짝 열린다.

내가 기억해내겠다며 애를 쓴 것도 아니다.

알리바바처럼 “열려라 참깨”를 외치지 않아도 된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기억이 난다.

장소가 주는 마력이다.

장소는 기억을 불러일으키면서 그 순간에 또 다른 마력을 발휘한다.

내 나이가 몇인지 잊어버리게 하는 마력이다.

그 장소에 도착하는 순간 내가 그곳에 왔었던 게 바로 엊그제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때나 지금이나 장소가 그대로이니까 나도 그때와 지금이 그대로라고 잠시 착각을 한다.

내가 내 모습을 볼 수 없으니 장소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나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소는 나에게 나이를 잊어버리게 하는 망각의 마력이 있다.




연애할 때나 신혼이었을 때 갔었던 장소를 아이들과 함께 들르게 되는 일이 있다.

신기하다.

장소도 그 장소이고 사람도 아내와 나 그 사람인데 저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 생겨나서 여기에 같이 있게 된 것일까?

그제서야 시간이 흘렀고 나와 아내가 변했음을 인지하게 된다.

시간이 지난 것에 대한 미련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렇게 잠시만이라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나중에 시간이 더 지나서 저 아이들이 또 그 장소를 찾아간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그때에는 저 아이들이 자기들의 엄마 아빠와 함께 지금 거기에 간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그때에는 저 아이들이 잠시라도 아이가 되어 어리광도 부리고 땡깡도 필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자기들의 엄마 아빠가 있으니까 충분히 그래도 괜찮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라 할 수 있는 길재는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라고 노래했다.

나라를 잃고 임금을 잃고 사람들을 다 잃었을 때 길재는 조용히 고려의 강산을 유랑했다.

사람들은 이제 조선의 강산이라고 했겠지만 길재에게는 여전히 고려의 강산이었을 것이다.

개성에 가면 궁궐이 있었고 그 안에 임금님이 계셨다.

하지만 지금은 안 계신다.

어쩌겠는가?

세상이 달라졌는 걸.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임금이 계시고 친구들이 있었고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게 설령 꿈이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을 다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산천이 달라졌으면 그런 꿈을 꾸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산천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으니 고맙고도 고마웠을 것이다.

세상이 다 변한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서 다행이다.




세상 많은 사람 중에 오래전에 다녀왔던 곳에 다시 온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모처럼 고향에 온 것처럼 반가이 맞아주는 사람, 어머니처럼 이모처럼 다사롭게 대해주는 사람, 아버지처럼 선생님처럼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 고등학교 친구처럼 허물없이 아무 말이나 주고받으며 허허 웃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면 나는 중년의 무거운 인생 짐을 잠시 내려놓고 때로는 징징대는 아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아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격정의 시기를 지내는 사춘기 청소년이 되기도 한다.

실은 내 안에 아기인 나도 있고 아이인 나도 있고 청소년인 나도 있는데 평상시에는 그 모습을 내비칠 수가 없다.

사람들은 내 나이에 맞는 나의 모습을 원한다.

나도 내 나이에 맞는 모습만을 내비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는 사이에 내 안의 다른 모습들이 주눅이 들었다.

오래전에 왔던 곳에 다시 왔을 때, 오래된 사람을 만날 때 내 안에 숨어 있던 모습들이 기지개를 켠다.


매거진의 이전글 더 큰 바보는 혹시 내가 아닐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