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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Mar 09. 2022

어느 쪽이냐고 묻지 말고 이름을 묻자!


독일 출신의 정치이론가였던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부모는 그녀에게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렌트는 자신을 독일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중 한 명이 그에게 ‘유대인’이라고 불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한나는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분명히 자신의 이름은 한나인데 친구가 한나라고 부르지 않고 유대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온 한나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유대인이냐고 물었고 어머니는 그녀에게 유대인이 맞다고 했다.

그러면서 친구들이 유대인이라고 놀려대면 가톨릭교인, 루터교인, 프로테스탄트처럼 자신은 유대인이라고 말하면 된다고 했다.

루터교회에 잘 나가지 않지만 자신을 루터교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한나의 가족도 비록 유대인 모임에는 잘 나가지 않았지만 유대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한나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이름을 불러줄 때는 한나에게 아무런 혼란이 없었다.

하지만 이름 대신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순간 큰 혼란을 느꼈다.

알고 지냈던 친구들이 모른 척 등을 돌렸고 열심히 연구한 논문도 출판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 독일이 낯설게 느껴졌다.

더 이상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을 재판하는 자리를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꺼내들었다.

평범한 보통 사람도 악한 조직에 충성하다 보면 악을 행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악은 평범한 사람의 얼굴로 다가온다는 충격적인 말을 함으로써 그녀는 세계 철학사에 한 획을 긋는 인물이 되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을 떠난 사람들 중에는 한나처럼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독일로서는 굉장한 손해였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나와 구분이 되기 때문에 그들을 부를 마땅한 명칭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름이 없으면 그 존재 자체를 인정받을 수 없다.

이름이 없으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도 없고 주민등록증을 가질 수도 없다.

뭐라고 부를 수도 없는 막연한 어떤 존재라고 할 수밖에 없다.

1894년 동학혁명과 갑오경장의 영향으로 한반도에 살던 모든 사람들이 비로소 성씨를 가질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양반에게만 성씨가 허락되었다.

양반이 아니면 그냥 부르는 게 이름이었다.

마당쇠, 개똥이, 돌쇠는 솔직히 사람에게 붙이기는 민망했다.

그만큼 그렇게 불린 이들에게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삼월에 태어나면 삼월이, 사월에 태어나면 사월이, 꽃필 때 태어나면 꽃네라고 부른 것도 사람 대접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나만의 이름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동양인 셋이 있는데 서로 국적을 따져서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이라고 부르면 그 순간 어색한 사이가 되어 버린다.

경쟁하고 무시하고 우월감과 열등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 셋이 서로 이름을 부른다면 친구가 될 수 있다.

서로 각기 다른 말과 문화를 가르치고 배우는 스승이 될 수도 있고 학생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전 세계가 나뉘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느 쪽이냐고 묻고 있다.

우리나라 안에서도 사람들이 나뉘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느 쪽이냐고 묻고 있다.

내 몸에 팔이 두 개가 있는데 한쪽은 오른쪽에 있고 한쪽은 왼쪽에 있다.

내 팔이 어느 쪽에 있냐고 하면 대답하기 난감하다.

리영희 선생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책 제목처럼 한쪽으로만 살 수가 없는 게 인생이고 세상이다.

어느 쪽이냐가 내 존재를 증명하는 게 아니고 내 이름이 무엇이냐가 내 존재를 증명한다.

나는 어느 쪽이 아니라 박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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