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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Sep 11. 2020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미국의 시인 제인 케니언(Jane Kenyon, 1947~1995)은 대학시절에 자신을 가르친 열아홉살 연상의 도널드 홀과 결혼하였다. 남편은 미국의 계관시인으로서 국가예술훈장까지 받은 대단한 시인이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미국인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미국인의 삶에서 시의 역할을 끌어올린 시인”이라는 극찬을 받은 인물이다. 그녀도 남편에 못지않게 많은 창작활동을 펼쳐서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끼쳤다. 그녀는 뉴햄프셔의 이글폰드 농장에서 살면서 시골생활의 풍경과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 그리고 신앙고백적인 내용들을 시에 담았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장밋빛으로만 채색되지 않았다. 평생을 조울증과 씨름하였고 사십대 중반에 찾아온 백혈병과 싸우다가 마흔여덟 해를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제인 케니언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지은 시 중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Otherwise’라는 시가 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못할 수도> 혹은 <어떤 하루>로 번역되어 있다. 시를 읊다 보면 우리가 일상으로 누리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들인지 저절로 인정하게 된다. 자연스레 헬렌 켈러의 수필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시는 읽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서 읊어야 제 맛이다. 비록 번역시이기에 원래의 운율을 느낄 수는 없지만 천천히 읊어보면 원래의 작품에 비슷하게나마 다가갈 수 있다. 시 전문을 실어본다.     


“건강한 다리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시리얼과 달콤한 우유와 흠 없이 잘 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개를 데리고 언덕 위 자작나무 숲으로 갔다.

아침 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웠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은촛대가 놓인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벽에 그림이 걸린 방에서 잠을 자고 오늘 같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느 날인가는 그렇게 못하게 되리라는 걸.”     


지금은 고인이 된 정채봉 시인이 암투병으로 입원해 있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병간호를 하던 딸이 “아빠, 생각해보니까 아빠가 일요일 오후에 소파에서 누워 텔레비전 보다가 낮잠 자던 때가 정말 좋았던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때 시인은 속으로 ‘딸아, 언젠가는 오늘을 생각하면서 일요일에 아빠 병간호하느라 병원에 있었을 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날이 올 거야.’라고 했다. 담담하게 써내려간 그 글을 보면서 ‘내가 놓쳐버린 것이 있구나!’ 생각을 했었다.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는데 그 사실을 자꾸 잊어버린다. 지금 나의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바로 그 순간 나는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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