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이름

by 박은석


집집마다 노란색 전화번호부가 전해질 때가 있었다.

새로 나온 전화번호부를 받으면 맨 처음 내 이름을 찾았었다.

물론 내 이름의 전화번호가 내 전화번호는 아니었다.

나는 아직 내 이름으로 전화번호를 받을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내 이름을 찾았던 것은 세상에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 있기는 있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박은석'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렇게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이번엔 기분이 살짝 상했다.

내 이름은 세상에서 나 혼자만 갖고 싶었는데 누군가 나와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는 게 기분이 나빴다.

다행히 자라오면서 내 근처에 나와 이름이 같은 인물은 없었다.

성씨가 다르든지 이름 세 글자의 획이 하나 차이가 있었다.

역사학자인 박은식 선생도 그랬고 같은 반 박은정이란 여자애도 그랬다.




얼마 전에 포털 사이트를 보니까 검색어에 내 이름이 떠서 깜짝 놀랐다.

브런치 사이트에 올리 내 글이 굉장히 높은 조회수를 기록해서 내 이름이 노출되었나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도 얼른 내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그랬더니 내 얼굴이 나오는 게 아니라 연예인 중에서 나와 이름이 같은 인물이 나왔다.

거 참, 연예인 이름으로 사용하기에는 별로 좋은 이름 같지는 않은데 그는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에게 박은석이라는 이름을 대면 사람들은 나보다 그를 더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나보다 한창 어린 친구에게 내 이름을 빼앗긴 기분이다.

옛날 사람들은 어릴 적 이름 외에도 성인이 되면 이름을 새로 짓고 또 호를 붙이면서 서너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이름 하나쯤 남에게 양보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오직 그 이름 하나뿐이다.

남에게 양보하고 싶은데 어떡해야 하나 고민이 많다.




윤제림 시인의 <재춘이 엄마>라는 시가 있다.

어느 아지매가 바닷가에 조개구이집을 냈는데 간판에 '재춘이네'라고 써 붙인 걸 보고 시인이 시 한 편을 썼다.


"재춘이 엄마가 이 바닷가에 조개구이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뿐이 아니다.

보아라, 저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


재춘이 엄마가

저 간월암 같은 절에 가서

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

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밖에 없어서

'김재춘'이라고만 써 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서 보아라.

갑수 엄마가 쓴 최갑수, 병섭이 엄마가 쓴 서병섭, 상규 엄마가 쓴 김상규, 병호 엄마가 쓴 엄병호.


재춘아, 공부 잘 해라!"


시를 읊는 내내 내 속에 숨어 있던 감정이 살포시 고개를 든다.

시 속에서 내 이름을 우렁차게 불러대던 아버지도 보이고 어머니도 보인다.




내가 태어났을 때 분명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고민을 하셨을 것이다.

성은 박씨이고 딸만 내립다 셋을 낳은 후에 얻은 아들이었다.

대장부 같았으면 좋겠고 재물의 복이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약한 이름은 싫으셨는지 입에 딱 붙는 이름을 고르셨다.

그렇게 내 이름을 짓고서 동사무소에 신고하러 가셨던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우셨을까? '박은석'이라는 이름을 짓고서 아버지 어머니에게는 이 세상에 그 이름은 나 하나뿐이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할 때도 "하나님, 우리 아들 은석이" 하셨을 것이고 어디 가서 사람들에게도 "우리 아들 은석이" 하셨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식해서 그러셨던 게 아니다.

다른 이름을 몰라서 그러셨던 것도 아니다.

아버지 어머니에게는 오직 그 이름에 없으셨다.

"우리 아들 은석이"라는 말이면 더 이상 갖다 붙일 말이 없었다.

그 이름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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