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서 좋은 프루스트 효과를 맛보길 바라며...

by 박은석


싸구려 크레파스에서는 코끝을 간지럽히는 이상야릇하고 달콤한 냄새가 난다.

아이들에게 크레파스에 대한 친근감을 북돋기 위해서 화학물질을 바른 것이 분명하다.

고무 냄새 같기도 하고 사탕에서 나는 냄새 같기도 하다.

이 냄새를 맡으면 순간 어질하고 속이 비릿하다.

오래전부터 이 냄새를 싫어했으면서도 이 냄새와 친근하다.

이 냄새가 나면 나는 국민학교 1학년 때의 옛날 내 어렸을 적 집에 가 있다.

그때 우리 집 안방에는 커다란 액자에 ‘상장’ 하나가 걸려 있었다.

‘위 어린이는...’ 이렇게 시작하는 상장의 문구는 그러니까 일본 나가현에 있는 어느 기관과 자매결연을 맺은 기념으로 백일장을 했는데 내 그림이 뽑혔다는 것이다.

무슨 그림을 그렸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그림을 그려서 받은 최초의 상이었고 지금까지는 최후의 상이다.

그때 상품으로 받은 48가지 색 크레파스에서도 이런 냄새가 났다.




12가지 색 크레파스가 전부인 줄 알았던 시골뜨기에게 1단, 2단 나뉘어서 배열되어 있던 48가지 색깔의 크레파스는 신기하고 요상한 물건이었다.

닳아 없어질세라 조심하면서 아껴서 썼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 내 돈으로 맘껏 크레파스를 살 수 있게 되었어도 그때의 감동을 느낄 수는 없었다.

정신없이 살다가도 동네 문구점에 들렀다가 그때의 크레파스에서 풍겼던 냄새를 맡게 되면 내 마음은 다시 국민학교 1학년 때로 돌아가곤 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딸아이가 10만원이 훨씬 넘는 프리즈마 150가지 색연필을 사달라고 했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흔쾌히 사줄 수 있었던 것도 국민학교 1학년 때의 그 색연필 때문이었을 것이다.

색연필을 보면 내 마음이 여덟 살로 돌아가고 색연필의 냄새를 맡기만 해도 내 마음이 여덟 살로 돌아가는 이유는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도 좋았고 너무나도 색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면 주인공이 어느 날 어머니가 차려주신 마들렌 빵과 차 한 잔을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마들렌 빵을 스푼에 올려놓아 찻물에 녹여서 한 모금 마셨는데 그 순간 그 맛을 어디선가 맛보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제였을까 어디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렸을 적에 지냈던 시골집이었다.

그때 일요일마다 고모님 방에 들렀는데 고모님이 주셨던 빵과 차가 바로 그 맛이었다.

그렇게 빵과 차의 맛을 알고 보니 고모님과 지냈던 일들과 그 시골 동네에서의 풍경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좋아했던 사람도, 함께 뛰놀았던 친구들도 떠올랐다.

한 조각의 빵과 한 잔의 차가 집과 정원과 마을을 불러왔다.

이처럼 우연히 경험하게 된 한 가지 일이 그동안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었던 어렸을 적의 일들을 하나씩 소환할 때가 있다.

그런 경험들을 사람들은 ‘프루스트 효과’라고 부른다.




프루스트 효과는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도 많이 일어난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사방 천지에 프루스트 효과를 일으키기 위한 준비물들이 널려 있다.

‘아! 이 냄새가 뭐더라?’

‘아! 이 장면을 어디서 봤더라?’하는 것들이 다 프루스트 효과와 연결될 것이다.

박완서 선생은 ‘싱아’를 보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며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들을 풀어냈고, 김용택 시인은 은행나무를 보고 <그 여자네 집>이란 시를 써서 애틋했던 짝사랑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을 볼 때도 프루스트 효과가 나타난다.

첫 만남인데 과거에 나를 괴롭혔던 사람이 생각날 수도 있고 나에게 잘 대해줬던 사람이 떠오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안 좋았던 기억들을 소환하기도 하고 좋았던 기억들을 소환하기도 한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좋은 프루스트의 효과를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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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네 집> - 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들어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빡깜빡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 오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 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옹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는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연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각.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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