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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May 13. 2022

세상 모두 안녕했으면 좋겠다


아침 출근길에 경비 아저씨를 만나면 우린 서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대답은 하지 않는다.

묻는 말로 족하다.

어제 만난 사람인데 오늘 다시 만나면 그때도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하루에 수십 번을 하는 인사이고 수십 번을 듣는 인사이다.

사람을 만나는 횟수만큼 ‘안녕하세요’의 인사말 횟수도 많아진다.

평생을 들어온 말이고 평생을 반복해서 하는 말인데도 질리지 않는 말이다.

‘안녕’이라는 말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대한 축복의 말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에게 “안녕 아가야!”라고 하는 말은 건강하게 잘 자라라는 축복의 말이 된다.

웃어른을 만나고 나오면서 안녕히 계시라는 말은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는 기원의 말이 된다.

시험을 앞둔 청춘에게 안녕은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며 결혼하는 이에게 안녕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서 잘 살라는 말이다.

정말 우리 모두가 안녕했으면 좋겠다.     




안녕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로 뻗어나가면 평화롭고 평안한 상태를 의미하게 된다.

싸움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안녕할 수가 없다.

편안하고 평안하고 안전하고 안정된 상태가 되어야 안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예측할 수 없는 변화의 상황이라면 안녕한 게 아니라 불안하다고 한다.

하루 종일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오르내리는 주가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안녕한 게 아니다.

들뜬 마음으로 새로운 사무실을 꾸미는 스타트업 창업자의 마음도 안녕한 게 아니다.

베테랑 운전사여도 사방에서 오토바이 폭주족들이 달려드는 길에서는 안녕할 수가 없다.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주문해도 갑자기 복통이 생기면 하나도 먹을 수가 없다.

안녕한 게 아니다.

식구 중 하나가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면 집안에는 순식간에 웃음이 사라지고 걱정과 한숨만 터져 나온다.

안녕은 모든 것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우리에게 찾아온다.

하나라도 조금이라도 자기 자리에서 틀어지면 안녕은 물 건너로 가 버린다.




고등학생 때는 대학에 들어가면 안녕할 줄 알았다.

막상 대학에 들어가 보니 숨어 있던 청춘의 고민이 한꺼번에 고개를 들었다.

군대를 다녀오면 안녕할 줄 알았다.

군대를 다녀오고 보니 일자리를 잡고 결혼을 해야 안녕할 것 같았다.

일자리를 잡고 결혼을 하고 보니 아이를 낳고 보금자리를 넓혀야 안녕할 것 같았다.

아이를 낳고 집을 넓혔더니 이번에는 부모님이 아프지 말고 식구들이 다 건강해야 안녕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병치레를 하느라 안녕할 틈새가 없었다.

기껏 이제 좀 숨통이 트이나 싶었는데 내 나이가 많아져 버렸다.

청춘의 탱탱한 힘이 사라지고 “에고고”하는 소리가 버릇처럼 입에 붙었다.

일평생 “안녕하세요?”를 외치면서 살았는데 일평생 안녕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안녕은 저 앞에 있는 무지개처럼 내가 다가가면 그 다가간 거리만큼 멀어지는 것 같다.




우리 자신이 불완전한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불완전하다.

뭔가 빠져 있고 부족한 기분이 든다.

그 불완전하고 부족한 것을 무엇으론가로 채워야 한다는 강박증이 우리를 짓누른다.

채워져야만 안녕할 수 있을 것 같다.

열심히 돈을 벌면 채울 수 있으려나, 부지런히 운동해서 건강해지면 되려나,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면 되려나, 오만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분명히 그것들이 우리를 편안하게는 해 준다.

잠시 안녕하게도 해 준다.

하지만 계속 안녕하게는 해 주지 못한다.

안녕은 잠깐 맴돌다가 떠나 버린다.

아! 그렇구나!

안녕은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안녕은 그때그때 내가 느끼고 누리는 것이다.

잠시 후면 이 안녕은 사라진다.

그전에 실컷 누려야 한다.

세상 모두 안녕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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