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물다섯 살에 군 입대를 했다.
논산훈련소에서 6주 동안 훈련을 받았고 강원도 홍천의 야전수송교육단에서 후반기 교육을 8주 받았다.
그 후에 자대 배치를 받았다.
5월에 입대했는데 후반기교육까지 마치고 나니 9월이 되었다.
이등병 계급장을 뗄 날이 얼마 안 남았을 때 자대에 간 것이다.
나이는 들었지만 모든 게 낯선 상황이었고 더군다나 군대였다.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툭 건드리기라도 하면 “이병 박은석!”이라고 외쳤다.
내무반에 도착하자마자 다들 밖으로 모이라고 해서 튀어나갔다.
그날 전역하는 고참이 있어서 환송식을 거행한다고 했다.
별 중의 별인 말년병장이 전역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저 앞에서부터 한 명씩 악수를 하면서 잘 있으라고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내 앞에까지 온 그 고참이 나를 쓰윽 훑어보더니만 “네가 제대할 날이 올까?”하면서 키득거렸다.
속에서 화가 났지만 내색할 수가 없었다.
환송식을 마치고 다시 내무반에 들어왔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는데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다.
대부분은 나보다 네 살이나 어렸다.
내 막냇동생과 동갑내기들이었다.
그들에게 “충성!” 경례를 붙이는 것이 너무나 자존심 상했다.
내 바로 밑의 동생은 나보다 한 살 어리다.
그 때문인지 나는 어려서부터 한 살 차이면 무조건 말을 놨다.
동생으로 대했다.
그랬던 내가 무려 네 살이나 어린 녀석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니게 되었다.
하기 싫어도 안 할 수가 없었다.
군대니까.
조금만 참자고 했다.
어차피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간다고 했으니까 언젠가 나도 전역할 날이 올 것이라 생각했다.
살아가면서 나이 어린 사람에게 인사할 날도 올 수 있는데 그때를 대비해서 지금 미리 연습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이등병 신세이지만 영원히 이등병은 아닐 거였다.
나도 언젠가 후임병을 맞이하게 되고 고참이 될 것이었다.
남들보다 나이 들었다고 기죽지 말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살기로 했다.
그렇게 인생이 억울하고 불공평하게 여겨질 때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을 생각한다.
그는 아버지가 60세 때 20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위로 배 다른 누나가 9명 있었다.
아버지는 그를 좋아했지만 식구들은 그를 싫어했다.
3년 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에서는 그와 그의 어머니를 쫓아버렸다.
몇 년 후 그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한참 돌봄을 받아야 하는 십대의 나이였지만 그는 살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면서도 틈이 나는 대로 혼자서 공부도 했다.
어떻게 하면 인생을 바르게 살 수 있을지 고민도 많이 했다.
좋은 선생님에게 가서 공부할 여건이 안 되었기에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보며 배웠다.
모든 사람이 그의 스승이었다.
50대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공직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14년이 넘도록 자신을 믿어줄 지도자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그의 인생은 한순간도 편안하지 못했다.
불행한 삶의 연속이었다.
그가 바로 공자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 잘 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잘 되고 잘 안 되고는 하늘의 뜻이다.
나는 단지 나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살면 된다.
시간이 지나면 후회할 일도 많겠지만 그런 후회를 최소화하면서 살면 된다.
정호승 선생의 수필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라는 책에 ‘바닥에 누워도 하늘을 본다’고 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모든 짐승들은 고개를 숙여서 땅을 보며 살게 만들었는데 유독 사람만은 고개를 하늘로 들어서 살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곧 죽더라도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살아야 한다.
그게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내가 잘 살고 있는지는 지금 내가 평가하는 게 아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내 뒤에 오는 사람들이 평가할 것이다.
정몽주는 조선을 개국하는 데 협조하지 않았기에 미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후에 조선 사람들도 그를 충신 중의 충신으로 추앙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죽는 순간까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