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의 것을 베끼며 살고 있다

by 박은석


서점에 가면 유명한 시인의 시집을 통째로 베낄 수 있게 만든 책이 있다.

시집 필사는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윤동주도 자기 선배인 백석의 시집 <사슴>을 구하려고 하다가 구하지 못하자 친구에게 빌려와서 통째로 베꼈다고 한다.

복사기가 없었던 시절, 문구류가 넉넉지 못했던 시절에는 책을 베끼는 게 흔한 일이었다.

읽는 것과 베껴 쓰는 것의 차이는 비교할 수가 없다.

손으로 써 보면 알 수 있다.

시간을 들인 만큼, 정성을 깃들인 만큼 감동과 여운도 오래간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를 필사한다.

그러다 보면 영감이 떠오르기도 하고 또 글쓰기 실력도 향상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도 누군가에게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꼭 베껴쓰기를 해 보라고 권한다.

신문 사설이든지 칼럼이든지 베껴쓰다 보면 실력이 는다.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은 다 베낀 것에서 시작되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야 없는 상태에서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처럼 뭔가 만들고 싶은데 인간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으니까 베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처음부터 베끼는 데 탁월한 실력을 가진 존재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엄마가 자기와 눈을 마주치는 것을 보고 엄마를 따라서 눈 마주치는 행동을 해 본다.

베낀 것이다.

엄마가 하는 말을 따라서 한다.

엄마가 먹는 것을 따라서 먹고 엄마가 하는 행동을 따라 한다.

아기는 모든 것을 베껴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아들은 아버지를, 딸은 어머니를 베낀다.

생김새도, 목소리도, 걸어가는 뒷모습도 제대로 베낀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보면 장돌뱅이 허생원이 자기와 함께 길을 가는 젊은이 동이가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대목에서 독자들의 가슴이 ‘쿵’하고 울린다.

베꼈다!




우리 주변에서 베끼지 않은 것을 찾아보기는 무척 어렵다.

미용실에 가면 어떤 스타일로 머리를 할 거냐고 묻는다.

그 스타일로 베끼겠다는 것이다.

옷을 사러 가면 옷 모양이 비슷비슷하다.

베꼈기 때문이다.

길가에 일렬로 주차된 자동차들도 비슷하게 베꼈다.

하루 세끼 먹는 밥과 반찬도 맛있다고 하는 레시피를 베낀 것이다.

미술 작품을 보면 작가만의 독특한 표현이 돋보이는데 그것도 자세히 보면 어디서 조금 베꼈다.

이전까지의 표현 방식들을 배우고 익힌 다음에 그 모양과 형태와 색채를 조금씩 변형시켜서 탄생시킨 것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음악은 없다.

이전의 음악을 답습한 후에 조금씩 변형시킨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하나의 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몇 개의 음이 합쳐지면서 화음이 생겼다.

그다음에 음의 길이가 길어지면서 합주곡도 되었고 오케스트라 음악도 되었다.




벌써 2,300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베껴쓰기의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간파하였다.

그가 쓴 <시학>을 보면 시와 문학, 희곡의 시작은 모방, 즉 베껴쓰기에 있다고 한다.

비극은 비극대로, 희극은 희극대로 잘 베껴써야 한다는 것이다.

잘 베끼기 위해서 플롯을 잘 만들고 등장인물들도 잘 설정해야 한다.

내용 전개도 때로는 드라마틱하게, 때로는 예상 가능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모든 과정이 최상의 작품을 베끼는 것 같은 작업들이다.

좋은 작품을 베껴서 나만의 내용으로 덧칠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산다.

그러니까 최고의 배우는 가장 잘 베끼는 배우이다.

배우들만 그런 게 아니다.

나도 베껴서 사는 인생이다.

누구를 닮고 싶냐고 묻는다면 누구를 닮고 싶다고 한다.

그분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분을 가장 많이 베끼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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