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은석 Oct 08. 2020

쿰바야(Kumbaya)를 아시나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흑인 영가로 ‘쿰바야(Kumbaya)’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의 가사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의 흑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걸러어(Gullah)로 쓰여 있다. 이 걸러어는 아직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발음한 말인데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콩글리쉬 같은 언어이다.

그러니까 원래 영어 가사인 Come by here를 자신들의 귀에 들리는 대로 Kumbaya로 발음한 것이다.


노래는 이 쿰바야란 단어가 계속 반복되는 매우 단조로운 형태를 띤다. 하지만 한 번 부르고 두 번 부르면서 누구나 이 노래의 깊은 울림에 빠져들게 된다.     



1492년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스페인은 무력을 앞세워 아메리카 대륙의 금과 은을 유럽으로 빼돌렸다.

이 과정에 수많은 원주민들이 학살당해 노동력이 현저히 부족하게 되자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고 와서 노예로 부려먹었다.


노예 착취는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흔히 미국은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다.

초창기 미국으로 건너간 유럽인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가기도 했지만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서 가기도 했고 금광을 찾아서 가기도 했다.

이주민들은 미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자연스럽게 흑인 노예들을 부리면서 광활한 땅을 개척해 갔다.

특히 남부의 목화 농장에서는 많은 일손이 필요했기에 그만큼 더 많은 흑인 노예들을 필요로 했다.     



흑인들은 일주일 내내 노동에 시달리다가 일요일이 되면 자기들의 주인댁 식구들을 모시고 교회로 갔다. 하지만 교회 마당까지는 가더라도 예배당 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예배당 밖에서 주인을 기다리다가 들려오는 찬송가를 엉겁결에 따라 부르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안에서는 “Come by here, My Lord! Come by here”라고 불렀는데 밖에 있던 흑인들은 대충 따라 부르면서 “Kumbaya My Lord! Kumbaya”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단순한 가사를 외워서 집에 와서 식구들과 함께 불렀고 목화농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불렀을 것이다.

누군가 한 사람이 선창을 하면 곁에서 후창을 하면서 그들은 고난의 세월들을 견뎌냈던 것이다.

“주여, 이곳에 오소서. 나의 주님이시여!”     



1863년 1월 1일, 노예해방전쟁으로 잘 알려진 미국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미국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에 의해서 노예해방령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흑인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고 사회 전반에 흑인 차별은 만연하였다.

1955년 12월 1일 목요일에 앨리배마주 몽고메리의 시내버스 안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로자 파크스(Rosa Parks)가 체포되어 구속되자 흑인인권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 여세는 1960년대에 반전평화 운동으로 이어져갔다.


그 저항운동의 한복판에서 조엔 바에즈(Joan Chandos Baez)라는 여성 가수가 호소력 깊은 목소리로 통기타를 치면서 Kumbaya를 부르자 이 노래는 일약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노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씩 조엔 바에즈의 Kumbaya를 듣는다. 그리고 한평생 이 노래를 부르며 살다 간 사람들의 기도소리를 마음으로 들어본다.

“주여, 이곳에 오소서. 나의 주님이시여!”

++ 조안 바에즈의 쿰바야 (https://youtu.be/Ca9s9UiHYvE)

작가의 이전글 힘들어도 꿈은 꿀 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