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절, 좋은 운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by 박은석


친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지금 너무 편안하게 살고 있는데 우리 부모님 세대는 참 고생을 많이 하셨다는 말이 나왔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힘든 시기였기에 각 가정에서도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정말 부모님 세대는 많이 힘드셨을 것이다.

그렇게 맞장구를 치다가 생각의 폭을 조금 넓혀서 질문을 했다.

“그렇다면 부모님의 부모님 세대는 어땠을까?” 그랬더니 그때는 더 힘드셨을 것이라는 말들이 나왔다.

한국전쟁과 그 이전의 일제강점기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 시대를 사셨던 분들은 정말 대단한 분들이시다.

그러면 부모님의 부모님의 부모님 세대는 어땠을까?

조선시대 말기에 사셨던 분들의 삶은 가난과 질병과 전쟁과 민란으로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은 정말 편안한가?

그것도 아니다.

당장 20~30대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이다.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3백 석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소설이지만 여자아이의 목숨이 쌀 3백 석이란다.

돈 많은 중늙은이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면 쌀을 준다니까 딸아이를 그렇게 보낸 사람들도 있었다.

좋은 시절이 아니라 비참한 시절이었다.

정지용의 시 <향수>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로 시작한다.

목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노래 부른다.

그런데 시의 중간쯤에 시인은 자기 아내를 등장시킨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을 줍던 곳’이다.

미모를 예쁘게 꾸밀 여력도 없고 제대로 양말을 사서 신을 여력도 없어서 사시사철 맨발이다.

따가운 햇살을 안고 일하면 너무 더우니까 등에 지고 이삭을 줍는 아내다.

정말 지지리도 가난한 날의 이야기이다.




과거의 한때 나의 삶도 <향수>의 등장인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십 보 백 보였다.

나에게도 사방이 꽉 막혀 있는 것처럼 보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어서 꿈에서도 열심히 뜀박질을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그때가 좋았다고 말한다는 게 가능할까?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결코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겠다.

그 험한 시간들을 지나면서 수많은 고생을 했다.

그 결과로 지금의 삶을 얻은 것이다.

운명이 있다면 그 운명은 나에게 엄청 가혹했고 종종 나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갔다.

그렇다고 해서 운명이 나쁜 것은 아니다.

운명은 바람처럼 나에게 불어닥쳤을 뿐이다.

그 바람을 타고 내가 날라가기도 했지만 그 바람을 타고 내가 날아오르기도 했다.

남들은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지만 나는 어쨌든간 견뎌냈고 살아남았다.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운명은 우리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하지 못한다.

단지 우리의 영혼에 재료와 씨앗을 줄 뿐이다.

그래서 우리 영혼이 원하는 대로 향하고, 실행할 수 있게 할 뿐이다.”라고 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우리의 굳건한 의지이다.

밤 아홉 시에서 열두 시까지 공부해야 하는 운명이라면 공부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불행한 시간이겠지만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행복한 시간이 될 것이다.

운명은 내가 어떤 자세로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좋은 것이 되기도 하고 나쁜 것이 되기도 한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이름 때문이라고 혹은 사주팔자가 좋고 나빠서 그렇다느니, 조상님의 묫자리가 어떻다느니 한다.

좋은 시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좋다고 받아들이면 좋은 시절이고 내가 나쁘게 받아들이면 좋지 않은 시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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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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