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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자기 말을 하고 싶었을까?

by 박은석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거의 모든 도시는 큰 강을 끼고 발달하였다.

강이 없는 내륙 깊숙한 곳도 잘 살펴보면 근처에 큰 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도 당연한 것이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인다 하더라도 물이 없으면 당장 그 도시의 기능은 마비가 된다.

사람을 비롯한 생명체들이 살아갈 수가 없다.

서울에 한강이 있고 파리에 센강이 있고 런던에 템즈강이 있듯이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는 블타바(Vltava)강이 있다.

블타바강은 그 길이가 무려 430Km에 이르며 체코 땅의 3분의 2를 적시는 거대한 강이다.

그래서 체코인들은 블타바강을 체코의 젖줄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강은 체코어인 블타바라는 이름보다 오히려 독일어인 몰다우(Moldau)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물론 체코에서 시작하여 독일까지 이어지는 강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 이 강의 이름에는 체코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흐르고 있다.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보다 100년 앞선 시대에 체코에서는 얀 후스(Jan Hus)라는 신학자가 나와서 종교개혁을 시작하였다.

물론 로마 교황청의 발 빠른 대응으로 1415년에 후스는 종교재판을 받고 많을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참혹하게 처형당했다.

하지만 후스의 개혁사상을 이어받은 체코인들은 가톨릭과 치열한 종교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물론 체코만 종교전쟁을 치른 것이 아니다.

1618년부터 1948년까지 30년 동안 유럽대륙은 온통 종교전쟁에 휩싸였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 의해서 각 지역의 종교가 인정되기까지 이 30년 전쟁은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 전쟁 중에 체코 땅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권이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등을 다스렸던 유럽 최강의 가문이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체코는 무려 300년 동안 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합스부르크 왕가 시절에 체코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쓰지 못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언어인 독일어를 사용해야만 했다.

우리가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말을 못 쓰고 우리의 글을 못 쓰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던 것처럼 그 시대의 체코인들도 자기네 강과 산, 골짜기와 벌판을 모두 독일어로 불러야 했다.

말을 잃고 글을 잃고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들의 민족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민족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존재감도 잃게 된다.

나라를 빼앗기더라도 민족성을 잃지 않으면, 말과 글을 잃지 않으면, 자신들의 이름을 잃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한글학회를 비롯한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그런 신념으로 독립을 꿈꿨었다.

2천 년 동안 떠돌이 민족으로 존재했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비록 땅은 빼앗겼지만 민족정체성만큼은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암울한 시기에 체코에 스메타나라는 걸출한 음악가가 등장했다.

그는 자신의 조국 체코의 자존심을 노래에 담아내려고 하였다.

체코의 옛 성 <비셰흐라트>, 체코의 강물 <블타바>, 체코의 전설 속 영웅 <샤르카>, 아름다운 국토 <보헤미아의 숲과 초원>, 후스파 종교개혁자들의 본거지인 <타보르>, 후스 종교개혁자들이 묻힌 <블라니크>를 제목으로 삼아 총 6곡으로 이루어진 교향시를 작곡하였다.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이다.

나는 어느 해인가 아침에 일어나면 자동적으로 <나의 조국> 2악장 <블타바>를 틀었었다.

그해에 한 300번은 들은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독일어 표현인 <몰다우>로 알고 있다.

블타바든 몰다우든 그 강이 그 강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스메타나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이 강은 몰다우가 아니라 블타바다!”라고 외쳤다.

체코의 땅을 흐르는 체코의 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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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중 제2악장 <블타바>를 한번 감상해 보세요.
https://youtu.be/kdstJCe4H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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