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기독교 신앙을 물려받았다.
나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른 길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유일신 신앙을 믿는 사람들 대부분이 경험해봤겠지만 나도 한동안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았다.
한쪽은 성스럽고 선한 곳이며 다른 한쪽은 세속적이며 악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성스러운 곳은 언제나 마냥 좋고 밝은 곳인데 세속적인 곳은 안 좋고 어두운 곳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세속적인 곳은 가능하면 피하려고 했다.
무엇이 성스럽고 무엇이 세속적인지에 대한 세부 기준은 때마다 달랐다.
하지만 공통적인 면이 있었는데 기독교와 연관된 것은 성스럽고 기독교와 관계없는 것은 세속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살다 보니 마음이 불편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성과 속으로 딱 나누어진 것도 아닌데 나는 자꾸만 둘로 나누려고만 하였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곳에 머물다가 세속적인 곳에 발을 담그면 깊고 깊은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세속적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어서 빨리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러다가 성스럽게 여기는 곳에 들어오면 한시름 놓은 듯이 숨을 헥헥거렸다.
그러면서도 나는 신앙을 지켰고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왠지 이긴 게 아니라 도망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떤 때는 도저히 내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질 때도 있었다.
학교에서 소풍이나 수학여행으로 유명한 사찰이나 암자에 갈 때가 그랬다.
그럴 때면 마음이 불편해서 어디 도망갈 데가 없나 찾아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를 숨겨줄 만한 곳은 없었다.
선생님을 따라서 사찰의 경내로 들어가야만 했다.
마치 지옥으로 끌려가는 불쌍한 짐승 같았다.
일주문(一柱門) 앞에 설 때면 건너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것 같았다.
일주문을 지나면 이제는 산 넘어 산이었다.
조그만 기와지붕의 천왕문(天王門)이 나오는데 그 좌우에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사천왕상이 서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덜컥 겁이 났었다.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지나가면 그다음에는 목탁소리와 향냄새가 진동을 했다.
대웅전의 거대한 불상을 볼 때면 마음의 불편함은 극에 달했다.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하는데 단체사진을 찍는다며 모이라고 했다.
그런 날은 어서 교회에 가서 세속의 때가 잔뜩 묻은 몸과 마음을 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내 마음속에는 세상을 둘로 나눠버린 가치관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랬던 나에게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세상을 종교적 관점으로만 보지 않고 사람 사는 곳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살다 보면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도 있고 다른 신앙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인데 그것으로 그 사람 전체를 규정짓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 세상을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굉장히 편해졌다.
전에 둘로 나누어서 보았을 때는 아군과 적군이 있는 것처럼 저쪽 편은 멸망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여지껏 멸망하지 않고 있는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도 그들을 봐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이 봐주시는데 내가 뭐라고 그들을 평가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나와 다른 신앙에 대해서도 조금 너그럽게 되었다.
그것도 하나의 좋은 가르침이고 좋은 문화유산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사소한 변화 같지만 나에게는 엄청난 차이가 되었다.
이제는 여행길에 유명한 사찰이 있으면 한번 찾아가 본다.
일주문을 지나도 천왕문을 지나도 대웅전 앞에 있어도 전혀 기죽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경치와 역사와 건축 양식을 보면서 실컷 즐기고 또 배우고 온다.
그것들이 또한 나의 생각과 신앙을 더욱 탄탄하게 해 주고 있다.
져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길 위에서 길을 잃은 것 같다.
길을 잃는 순간은 항상 길 위에 있을 때였다.
길을 물을 때도 길 위에 있을 때였다.
길을 돌아갈 때도 길 위에 있을 때였다.
길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도 길 위에 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