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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Aug 10. 2022

무계획인 여름휴가가 놀라운 시간이 될 수도 있다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여름휴가인데 이렇게 조용히 보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름휴가만의 특별한 설렘이 있었는데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올해도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있다.

3년 전까지는 그런대로 아쉽지 않게 보낸 것 같았다.

실컷 물놀이도 하고 맛있게 먹기도 하고 편안한 데서 잠도 잤다.

이제 그런 기회를 얻기는 힘들 것 같다.

설령 상황이 좋아져서 여행에 불편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아이들이 그만큼 성장해 있을 테니까 예전처럼 내 품 안에 둘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예전에 아이들을 등에 태우고 허우적거리며 수영했던 기억이 너무나 그립다.

아이들과 함께 슬라이드를 타면서 즐거워했던 추억이 너무나 아련하다.

온갖 재료를 넣고 나만의 레시피로 음식을 만들어서 아이들과 함께 먹었던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다.

이제는 너무나 먼 이야기가 되었다.




올해의 여름휴가는 비 소식과 어우러져서 더더욱 차분해졌다.

착 가라앉은 공기 못지않게 휴가 분위기도 가라앉아 있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부담감에다가 중고등학생인 아이들의 공부에 대한 부담감도 가미되어 있다.

그 외 이러저러한 사정 때문에 이렇게 집에서 푹 쉬면서 황금 같은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다.

그래도 이렇게만 보낼 수 없어서 아들에게 야구장에라도 갈까 물어봤다.

이 녀석도 기분이 싱숭생숭인지 생각해보겠다며 애매한 반응을 보인다.

이번에는 수도권을 떠나서 대전까지 가는 것이어서 좋은 미끼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반응이 미적지근하다.

그날 비가 올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괜히 갔다가 경기는 우천취소되고 고속도로에서 시간을 다 보낼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늘 일기예보를 보니까 우리가 가려고 하는 날 대전의 비 올 확률이 낮아졌다.

그래서 기분 좋게 아들과 가기로 했다.




금요일 오후에 대전까지 가려면 넉넉잡고 3시간은 생각해야 한다.

야구 경기 3시간 30분에 다시 올라오는 시간 2시간 30분이다.

그 사이에 1시간이 또 추가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오후 3시에 출발해서 새벽 1시에 돌아오는 일정이다.

그래, 가 보자! 우리 부자의 응원 덕분에 엘지트윈스가 한화이글스를 상대로 승리한다면 이번 여름휴가에 추억거리 하나는 두둑이 챙기게 되는 셈이 될 것이다.

사실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한 휴가라고 하더라도 생각지도 못한 사건 사고 때문에 최악의 휴가가 될 수도 있다.

한번은 갑자기 불어닥친 태풍 때문에 목적지에 가 보지도 못한 채 예약한 숙박비와 교통비를 홀라당 날린 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비행기 출발이 지연되는 바람에 항공사의 다양한 서비스를 받고 더 좋은 등급으로 보상을 받았던 적도 있다.

계획은 우리가 세웠지만 여름휴가의 일정은 우리의 생각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윈스턴 처칠이 어릴 적에 여름휴가로 시골 마을에 갔었다고 한다.

그때 멋진 호수가 있어서 다가갔다가 발이 미끄러져서 물에 빠졌다.

수영을 못 했던 어린 처칠이 ‘이제 죽는구나!’ 생각했던 순간에 그 마을의 가난한 소년이 물에 뛰어들어 그를 구해주었다.

처칠의 집에서는 너무나 고마워서 보답하고 싶었다.

마침 소년의 꿈이 의학을 공부하고 싶은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가 공부할 수 있게 지원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의학공부를 하게 된 소년이 바로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수많은 사람을 질병에서 구한 알렉산더 플레밍이다.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을 보면 주인공이 어렸을 때 마리아를 만난 것도 마리아가 주인공의 이웃집으로 여름휴가를 왔기 때문이었다.

여름휴가는 한여름밤의 꿈처럼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도 하고 놀라운 인연을 맺게도 해 준다.

어쩌면 무계획인 이번 여름휴가가 그런 시간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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