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에 같은 교회에 다니던 분은 횡단보도에 서 있던 딸아이가 지나가던 자동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겨우겨우 그 슬픔을 견뎌가던 2년 후에 이번에는 아들이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다 키운 20대의 건장한 딸과 아들을 그렇게 잃었다.
10년 전 태풍이 심하게 몰아치던 어느 여름날 아침에 교회로 출근하던 젊은 전도사에게 가로수가 덮쳤다.
결혼한 지도 1년이나 되었을까?
그 부인은 그렇게 남편을 하늘나라로 보냈다.
이름도 얼굴도 몰랐지만 우리 동네에 살던 나의 이웃이었다.
그즈음에 나는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폐암이 발병된 한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벌써 투병 생활이 꽤 진행되고 있었다.
오래 살지 못할 것은 그도 나도 그의 부인도 알고 있었다.
지방에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는 외동아들이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처럼 매주 그를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의 집에 들렀다 왔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참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다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데 행복은 가까이 다가가면 멀리 도망치는 것 같다.
열심히 노력하고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이상하게도 불행한 일이 더 많이 생기는 것 같다.
반면에 정말 못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받는 사람은 오래도록 장수하고 돈도 많이 벌고 떵떵거리며 사는 것 같다.
그래서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나오는 것일까?
이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속으로 불러본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 것입니까?’라고.
인생은 고해와 같다며 어차피 고생하다가 가는 게 인생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다.
기왕이면 남들처럼 누리고 남들만큼 즐기고 남들 못지않게 건강하게 웃으며 살다가 갈 수도 있지 않은가?
삶의 질을 평균 내 보면 어떤 사람은 평균보다 한참이나 밑도는 삶을 살다가 가는 것 같다.
그래서 인생이 매우 불공평해 보인다.
나라별로 행복지수를 매긴다고 했을 때 사회복지 수준이 높은 북유럽의 국가들 못지않게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로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을 꼽는다.
부탄이나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들이 단골손님으로 거론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행복지수라는 조사를 어느 만큼 믿을 수 있을까?
열이 나서 사경을 헤매는 아이를 안고서 병원 문턱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그 가난한 사람들에게 행복지수가 높은 백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루 두 끼 식사도 못하는 배고픔이 몰려올 때, 그래도 정신적으로 행복하면 좋은 것이라고 섣불리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깊은 슬픔이 있고 눈물이 있고 통곡이 있다.
그때의 불행의 늪은 너무 깊어서 제대로 측량할 수조차 없다.
사진 찍을 때는 웃음 짓지만 돌아서면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행복은 무지개처럼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 쇼펜하우어처럼 행복 같은 것은 던져버리고 우울한 기운을 잔뜩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할까?
그렇지 않다.
설령 잡을 수 없는 행복이라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사는 게 나을 것 같다.
미국의 시인 더글라스 말로크는 <행복을 믿어야 한다>라는 한 편의 시를 통해 나에게 그런 마음을 심어주었다.
“당신은 행복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행복은 오지 않습니다.
나는, 새가 발견한 것이 부스러기뿐인데도 불구하고 짹짹거리는 것을 압니다.
새싹이 난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눈이 내리는 날에는 풀을 믿어야 합니다.
아, 그것이 새가 노래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의 가장 어두운 날에 그는 봄을 믿습니다.
행복을 믿어야 합니다.”
그동안 행복을 잡으려고 했는데 이 시를 보니까 행복은 잡는 게 아니었다.
행복은 믿는 것이었다.
행복이 어디에 있냐는 질문에 나는 우물쭈물 대답을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행복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