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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Sep 05. 2022

태풍 때문에, 바람 때문에 우리가 산다

    

1주일 전부터 태풍이 다가온다고 전국이 난리다.

온다 온다 하더니만 정말 가까이 다가왔다.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오늘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빗줄기도 굵어졌고 바람도 조금 거세지고 있다.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은 더 거세질 것 같다.

태풍의 영향권이 워낙 넓어서 우리나라를 비켜 간다고 하더라도 곳곳에서 피해가 속출할 것 같다.

내륙 깊숙한 곳에 들어와 산 지 30년이 되어서 그런지 태풍이 온다고 해도 그리 크게 걱정되지는 않는다.

이곳에는 별 영향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 주변 사람들이 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저녁에 만난 경비아저씨는 오늘 밤을 뜬눈으로 지새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방송에서는 연신 제주도와 부산의 바닷가를 보여주고 있다.

큰 파도가 넘실대며 방파제를 넘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이다.

그렇다.

내가 섬사람이기 때문이다.




돌, 바람, 여자 많다는 제주도에는 태풍도 많다.

어떤 때는 7월에 몰려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9월에도 오지만 주로 8월 15일을 전후로 해서 찾아왔다.

필리핀 쪽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했다.

더운 지방의 수증기를 잔뜩 품고 있다가 서늘한 지역에 비를 뿌리고 간다고 했다.

단순히 비만 뿌리는 것이 아니라 심한 바람을 동반한다.

그래서 태풍이 반갑지 않은 거다.

수확을 앞둔 농작물은 태풍을 만나느냐 안 만나느냐의 차이로 상품가치가 달라진다.

나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수박밭에 가서 실컷 놀라고 하셨다.

너무 기분이 좋은 나는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별의별 쇼를 다 했다.

발차기도 하고 주먹질도 하면서 누가 수박을 많이 깰 수 있는지 시합을 했다.

철부지였다.

바로 일주일 전에 태풍이 훑고 지나가서 수박을 내다 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 멀리서 아버지는 울고 계셨는데 아들은 웃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육당 최남선의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배웠다.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 바린다.’ 우리 문학사에서 현대시로 가는 길목에 있던 시였다.

제목에 나오는 ‘해’가 하늘의 해가 아니라 ‘바다 해(海)’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도 드물었다.

어쨌든 그 시를 읊으면서 엄청난 파도가 덮치는 상상을 했었다.

낭만이 아니었다.

두려움이었다.

방파제를 넘은 파도는 그냥 쭉 뻗어버리지 않는다.

자기가 왔던 바다로 다시 돌아간다.

한번 경계선을 넘어온 파도는 싸그리 휩쓸고 돌아간다.

그 물의 힘에 의해 그때까지 잘 쌓아왔던 것들이 부서지고 무너져버린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다.

불에 탄 것은 다 타지 않는 한 조금이라도 쓸 수가 있다.

하지만 물에 휩쓸린 것은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물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

그런 무시무시한 물을 몰고 오는 것이 바로 태풍이라는 바람이다.




태풍과 같은 바람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무식한 생각은 하지 말자.

비록 태풍이 반갑지 않은 손님이기는 하지만 태풍 때문에 바닷물이 깨끗해지고 태풍 때문에 지구의 온도가 적절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태풍 때문에 많은 피해가 생기기도 하지만 태풍이 없으면 더 큰 피해가 생길 수밖에 없다.

태풍은 우리에게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짓는 거래와 같다.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된다.

서정주 시인은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스물여덟 살 동안 자신을 키워준 것의 8할은 바람이었다고 했다.

그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바람이 불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바람이 그를 키웠다.

그 모진 바람을 맞다 보니까 시인이 된 것이다.

서정주 선생처럼 우리도 거센 바람을 맞고 있다.

피할 수 없는 태풍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그런데 그 바람은 우리를 파멸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든든하게 한다.

그 바람 때문에 우리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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