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없이 무너져 내릴 때가 있다.
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발이 몸을 지탱하지 못할 때가 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도 너무나 힘이 들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만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그냥 주저앉아야 한다.
주저앉지 않고 버티려고만 하면 더 크게 쓰러질 수 있다.
그것보다는 지금 털썩 주저앉는 게 나을 수 있다.
어차피 한번 일어서기 위해서는 한번은 주저앉아야 한다.
그러니까 주저앉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주저앉는 것은 힘이 약한 자들만의 모습이 아니다.
힘이 센 사람도 주저앉는다.
키 작은 사람은 별소리도 없이 ‘폭’ 주저앉지만 거구는 엄청난 소리를 내며 ‘꽈당’ 주저앉는다.
주저앉는 것에서 비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주저앉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주저앉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건 우리 몸이 지금 매우 지쳐있어서 잠깐 쉴 때가 되었다는 신호이다.
그 신호를 잘 해석해야 한다.
갓 걸음마를 익힌 어린 아기가 걸을 수 있는 거리는 겨우 몇 걸음이다.
그 후에는 철퍼덕 주저앉는다.
그런데 아기는 주저앉으면서도 입을 헤벌쭉거리며 재밌어한다.
주저앉는 순간, 엉덩이에서부터 온몸으로 전해지는 그 출렁임을 즐거워한다.
어른들이 ‘걸. 음. 마!’를 외치며 몇 걸음 더 걸으라고 응원하지만 아기는 주저앉는 편을 택한다.
걷기 힘들어서 주저앉는 게 아니라 주저앉기 위해서 걷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서 다시 한 번 보면 아기는 지금 걷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주저앉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이만큼밖에 못 걸었다고 아쉬워하지도 않고 속상해하지도 않는다.
한 번 주저앉을 때까지 이만큼이나 걸을 수 있었다는 것에 뿌듯해한다.
주저앉으면 걸을 수 없고 걸을 수 없으면 저만큼 갈 수도 없지 않냐고 걱정하지도 않는다.
내가 걷지 못하면 누군가 나를 안고 엎고 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주저앉는 것을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저앉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실력이다.
제때에 잘 주저앉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고난이도의 기술이 있어야 한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는 엄폐물 뒤에 잘 주저앉아야 한다.
숨바꼭질할 때는 내 몸이 술래에게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주저앉아야 한다.
선생님이 까다로운 질문을 할 것 같으면 앞 친구의 몸 뒤로 내 몸을 숙이고 주저앉아야 한다.
눈 마주치면 걸린다.
주저앉으면 내가 남보다 낮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낮은 자리에 앉아 있고 상대방은 내 앞에 서 있기 때문에 내가 상대방을 올려 보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록 내가 주저앉아 있다고 해서 기가 죽으면 안 된다.
앉아 있는 사람과 서 있는 사람 중에서 누가 높은 사람인가 물으면 당연히 앉아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잘 주저앉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주저앉으면 다 끝났다고만 생각할까?
너무 힘든 상태에 도달했을 때만 주저앉기 때문일까?
회복 가능성이 전혀 안 보일 때만 주저앉아서 그런 것일까?
그러나 주저앉아보면 알 수 있다.
주저앉으면 편하다.
몸을 쉬게 할 수 있다.
주저앉으면 더 멀리, 더 높이 뛸 수도 있다.
주저앉으면 일어섰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다.
눈높이가 높은 것만 좋은 것이 아니다.
낮은 것도 충분히 좋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망원경으로 봐야 하는 넓고 큰 우주도 있지만 현미경으로 봐야 하는 아주 좁고 작은 세상도 있다.
둘 다 그 시작과 끝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든지 세상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주저앉는 때를 바라보면 주저앉는 그 순간 우리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제대로 폼나게 주저앉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