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가 깊은 인생이 명품 인생이다

by 박은석


한동안 쉬는 날이면 산에 갔던 적이 있다.

내가 갈 수 있는 산은 무엇보다도 당일치기가 가능한 산이어야 했다.

폼나게 등산장비를 갖춰 입고 가지 않아도 되는 야트막한 산들이었다.

성남시 분당구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가까운 산이라는 게 청계산, 광교산, 그리고 불곡산에서 남한산성까지 이어지는 산길이 고작이었다.

기껏해야 해발고도 500미터 남짓한 야트막한 산들이다.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도달하는 데는 한 시간 정도면 충분했다.

숲길을 헤치고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 나온다.

등산이라기보다 가벼운 운동이나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배낭 안에는 뜨거운 물을 넣은 보온병과 사발면, 김치, 된장, 풋고추, 그리고 생수 한 병이면 충분했다.

산 정상에는 막걸리와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가 있고 산 아래로 내려오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한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기 때문에 특별히 준비하거나 신경 쓸 게 없었다.




그런데 1년에 한 번 정도는 시간을 내서 설악산에 다녀왔다.

설악산 단풍이 절정인 10월 둘째 주 월요일이었다.

내가 월요일에 쉬기 때문이고 월요일이 상대적으로 등산객이 적은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설악산에 가는 길은 청계산에 가는 길과 달랐다.

우선 준비할 게 많았다.

배낭의 크기부터 달랐다.

여차하면 산에서 하룻밤을 지새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했다.

가을 날씨지만 산에서는 겨울이 일찍 오기 때문에 겨울 산행처럼 두터운 여벌 옷을 준비해야 했다.

실제로 설악산 대청봉에서 내려오는 길에 진눈깨비를 맞은 적도 있다.

산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쌀과 반찬, 라면 등 몇 끼 식사와 버너, 코펠도 준비해야 했다.

생수도 한 병으로는 부족하고 두세 병은 있어야 하고 등산스틱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용품이다.

비나 눈이 올 것을 대비해서 판초우의도 넣고 밤 산행에 필요한 랜턴도 준비해야 했다.




설악산에 다녀오려면 교통편도 잘 알고 있어야 하고 등산코스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산에서 한 번 길을 잘못 들면 그 후의 일정은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 있다.

비상 상황이 일어날 수 있으니 산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뿐만 아니라 산에서는 다쳐서도 안 된다.

여럿이서 산행할 때는 다치더라도 도와줄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혼자 산행하는 경우에는 다리를 삐끗하더라도 큰 낭패다.

그러니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휴대전화 배터리도 신경 써야 한다.

듣고 싶은 음악 다 들으면서, 전화하고 싶은 친구에게 전화하면서 휴대전화 배터리를 소진시켜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아껴 쓰고 남겨 둬야 한다.

비상 상황에서 전화 몇 통은 할 수 있도록 보조 배터리도 준비해야 한다.

이처럼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니 배낭에 들어가는 물품이 엄청나다.

당연히 배낭의 크기가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청계산이나 광교산을 가는 것과 설악산에 가는 것 사이의 차이가 있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이나 낮은 산을 가는 것이나 비슷한 시간 동안 걷는 운동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몰라도 한창 모르는 사람이다.

500미터 남짓한 산과 1천 미터가 넘는 산은 비교할 수가 없다.

500미터의 산은 숲길을 지나다가 정상을 만나면 멀리 보이는 시가지를 바라보고 내려오면 끝이다.

그러나 설악산처럼 1천 미터가 넘는 산에 갈 때면 여러 개의 봉우리를 지난다.

그때마다 봉우리 밑에 드리워진 골짜기를 볼 수 있다.

깎아지른 절벽을 만나게 된다.

그 절벽 위에 서서 발아래 드리워진 골짜기를 내려다보면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아찔한 기분이 든다.

그 깎아지른 절벽을 보려고, 발아래 드리워진 골짜기를 보려고 설악산을 오르는 것이다.

설악산처럼 명산은 골짜기가 깊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골짜기가 깊은 인생이 명품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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