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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Sep 18. 2022

기억하지 못하면 소망이 없다


헬렌 켈러는 태어난 지 19개월쯤 되었을 때 큰 병을 앓고 시각과 청각 그리고 말을 잃어버렸다.

끝을 알 수 없는 암흑 속에, 자기만의 생각 속에 갇혀서 지내던 그녀였기에 6살 무렵에 설리반 선생님을 만났을 때도 도무지 교육이 되지 않았다.

설리반 선생님은 헬렌을 어떻게 교육시킬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도무지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설리반 선생님은 헬렌을 마당의 펌프가로 데리고 가서 물을 만지게 했다.

아마 그때도 헬렌이 발작을 하고 난리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물을 만지던 헬렌이 갑자기 “물(water)”이라고 말하였다.

비록 자신이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떤 소리를 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헬렌의 입이 ‘물(water)’이라는 단어를 발음한 것이다.

헬렌이 어린아기였을 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물’이었는데 그때의 감각을 기억하여 ‘물’을 외친 것이다.




‘물’ 한마디를 발음한 것이 무슨 대수냐고 하겠지만 설리반 선생님은 그 순간 굉장한 희망을 보았다.

헬렌의 손으로 물을 만지게 하고 헬렌의 손바닥에 ‘물(water)’이라는 영어 스펠링을 써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헬렌의 손가락을 설리반 선생님에 입술에 대게 해서 ‘물(water)’을 발음할 때의 입 모양을 손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바로 그 순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을 할 수 없었던 헬렌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헬렌이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의 귀로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헬렌은 두 귀가 아닌 손가락과 손바닥을 이용해서 설리반 선생님의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헬렌은 계속 말을 했고 계속 들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전까지는 아무도 헬렌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헬렌에게 들리도록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설리반 선생님의 대단한 점은 헬렌이 기억할 수 있는 말들을 찾아준 것이다.

그리고 헬렌이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이용해서 헬렌의 잠재력을 끌어올린 것이다.

만약 내가 설리반 선생님이었다면 헬렌이 ‘물(water)’이라는 단어를 발음했을 때 ‘어? 쟤가 뭐라고 그랬지? 내가 뭐 잘못 들었나?’라고 생각하면서 무시해버렸을 것이다.

헬렌이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물’을 발음하지 않았다면 입을 얼버무리다가 얼떨결에 말 비슷한 소리를 낸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설리반 선생님은 나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헬렌의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이 저장되어 있다고 믿은 것이다.

헬렌이 병을 앓기 전에 익혔던 말들이 그의 마음속에 그리고 머릿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었다.

단지 지금은 보통의 사람들처럼 표현하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방법으로 헬렌의 머릿속에 있는 말들을 끌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헬렌 켈러가 고난을 이겨내고 위대한 위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 배웠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 같지만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들 때문에 우리 삶에 기적이 일어난다.

사실 우리 삶의 모든 패턴이 기억대로 움직이고 있다.

배우고 익힌 그 기억에 따라서 우리가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쉬기도 하고 계획도 한다.

삶이 너무 힘들어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 건네는 말도 “기억해 봐!”라는 말이다.

과거의 약속들을 기억하고 과거의 힘들었던 때를 기억해보면 지금 이 상황을 조금은 여유 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나이가 더해 가면서 기억하는 일보다 잊어버리는 일이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예전에는 총명했는데 요즘은 총기가 사라진 것 같다.

망각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애써 위안을 삼는다.

그러면 안 된다.

애를 쓰더라도 기억을 되찾아야 한다.

기억하지 못하면 소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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