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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Sep 19. 2022

가을의 감사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창밖의 하늘을 보니 새파란 바탕에 솜사탕 같은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몰려 있다.

한낮의 햇살이 따갑기는 하지만 벌써 가을이 찾아온 것이다.

아무리 바쁘게 살아가고는 있지만 가을이 오면 계절을 한번은 타야 한다.

입술을 열어서 ‘가을’하고 소리를 내 보면 목청 깊은 곳까지 긴 떨림이 이어진다.

유음인 ‘ㄹ’ 발음이 목청을 울리기 때문이다.

그 떨림을 따라가다 보면 꼬불꼬불한 시골길도 떠오르고 누런 곡식들이 넘실거리는 들판도 떠오른다.

추수를 앞둔 농부의 발그레한 얼굴도 떠오르고 ‘천지 삐까리’라고 하는 경상도 사람들의 말을 따라 여기저기 곡식 이삭이 널려 있는 논밭도 떠오른다.

마당 한 귀퉁이 있는 감나무에는 높은 가지마다 알록달록한 감이 잘 익어 있고 밥상에는 알록달록 오곡의 곡식들이 넘쳐난다.

가을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고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는 넉넉한 계절이다.




봄에 추수를 하는 보리도 있고 여름에 추수를 하는 과일들도 있지만 그래도 추수를 생각하면 가을이다.

가을은 한 해 동안 애써 길러낸 농작물들을 거두어들이는 추수의 계절이다.

이 ‘추수(秋收)’라는 한자어를 살펴보면 ‘가을 추(秋)’라는 글자는 ‘곡식 화(禾)’자에 ‘불 화(火)’자가 합쳐져서 생성된 말이다.

그러고 보니까 내 어릴 적만 하더라도 타작마당에서 보리 이삭, 벼 이삭을 불에 태워 먹었었다.

한참을 먹다 보면 손도 새까매졌고 얼굴도 새까매졌었다.

눈동자의 흰자위만 하얗게 빛났던 그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추(秋)’자에 이어서 나오는 ‘거둘 수(收)’자는 ‘때릴 복(攵)’에 ‘얽힐 구(丩)’가 합쳐져서 생성되었다.

다 익은 곡식을 한 단 한 단 묶고 타작마당에서 도리깨로 내려치면서 타작하는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이렇듯 추수라는 글자만으로도 우리는 어렸을 적 고향 생각과 함께 가을의 훈훈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추수의 계절이라고 하더라도 이 가을이 오기까지 농부는 어느 한순간도 마음 놓고 편안히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봄철에는 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게 때를 맞춰 파종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여름의 땡볕 아래서는 땀으로 옷이 흥건하게 젖더라도 김매기를 하고 거름을 주어야 했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는 드러누운 이삭들을 세워주어야 했다.

장마철의 눅눅한 공기와 혹독한 뙤약볕이 내리쬐는 혹서의 시간도 견뎌내야 했다.

때를 놓친 씨앗은 제대로 영글지 않는다.

땀 흘리지 않고는 농작물을 거둬들일 수 없다.

비바람에 쓸려버린 나무에는 열매가 없고 폭염에 말라버린 가지에도 결실이 없다.

지나온 봄 여름의 어느 때인들 만만한 시간은 없었다.

고통의 연속이었던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가을걷이의 꿈을 간직하며 참아야만 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 이 가을의 정취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해마다 찾아온다고 해마다 가을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올해의 가을을 넉넉한 마음으로 만끽할 수 있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그동안 흘린 한 방울 한 방울의 땀이 헛되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손을 모으고 마음을 졸이며 기도했었던 일들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풀렸다는 증거이다.

내가 똑똑했고, 사리 판단을 잘했고, 운이 좋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마치 내가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순간순간마다 나를 도와주었던 여러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나를 이끌기도 하고, 붙잡기도 하면서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다.

주저앉지 말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꿈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가을의 결실을 바라보자고 격려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기에 이 가을에 온 마음을 다해 고백하고 싶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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