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이 보고 있는 동화책을 들여다보면 ‘그래서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다.
<신데렐라>가 대표적이다.
그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나도 신데렐라나 백마 탄 왕자를 만날 수 있지는 않을까?’ 기대를 한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왕비로 변한 신데렐라도 없고 백마 탄 왕자도 안 보인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계모 밑에서 고생하는 불쌍한 신데렐라만 있다.
왕비가 된 신데렐라가 없으니 오래도록 행복하게 사는 인생도 보이지 않는다.
만약 신데렐라가 진짜로 있다면 그녀에게 찾아가서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물어보고 싶다.
얼굴이 예쁘면 되는 것일까?
마음이 착하면 되는 것일까?
왕자의 마음을 잘 훔치면 되는 것일까?
동화책은 신데렐라가 결혼하는 장면에서 끝을 맺는다.
오래도록 행복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왕자가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신데렐라는 무척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혹시 자신이 왕자에게 무슨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생각했을 것이다.
왕자의 청혼을 기다리는 공주들과 귀족 집안의 아가씨들도 많을 텐데 왜 자신 같은 천한 신분의 사람을 찾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강화도 도령 철종 임금처럼 신하들이 자신을 찾으러 왔을 때는 부뚜막에라도 숨어 있었을 것이다.
술래잡기 같은 시간이 지나고 왕자에게 이끌려갔을 때는 부들부들 몸이 떨렸을 것이다.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도 마주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청혼하는 왕자의 음성을 듣고서는 하늘이 노랗게 보였을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자신에게 다가옴을 느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궁궐 안 모든 사람의 눈과 귀가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는 것도 느꼈을 것이다.
그 숨막히는 현장 속에서 신데렐라는 어떻게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
신데렐라가 궁궐 안에서 오래도록 행복하려면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 했다.
그 하나는 내적인 것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포용력이다.
모든 게 낯선 상황이다.
하루 지나면 또 하루가 낯선 날이다.
한 사람을 알면 또 모르는 사람이 보인다.
그 사이에서 생존하려면 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그 환경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이 포용력의 바탕 위에 또 하나의 요소가 있어야 했다.
그것은 외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력이다.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행복이 넙죽 절을 하며 찾아오지는 않는다.
행복은 의지력을 발동하여 힘써 쟁취해야 한다.
궁궐의 문화도 모르고 신하들의 속마음도 몰랐다.
왕자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왕족의 삶도 몰랐다.
신데렐라는 온통 모르는 것투성이었으니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의지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신데렐라에게 행복이 찾아온 줄 알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행복이 신데렐라를 찾아온 게 아니라 신데렐라가 행복을 잡은 것이었다.
한번 잡은 행복을 놓지 않으려고 계속 꽉 잡고 있었던 것이었다.
신데렐라가 오래오래 움켜잡고 있었던 그 행복의 열쇠는 바로 ‘배움’이었다.
자신에게 닥친 상황들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배웠고, 자신이 모르는 것들은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배웠다.
끊임없이 배웠기 때문에 끊임없이 성장했고 끊임없이 성장했기에 끊임없이 행복할 수 있었다.
만약 나에게서 행복이 떠나간 것 같다면 떠나간 행복을 아까워하지 말고 새로운 행복을 찾으면 된다.
찾는 방법은 신데렐라가 알려줬다.
뭐 새롭게 배울만한 게 없나 찾아보는 것이다.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않겠냐는 말은 옛사람들의 고리타분한 말이 아니다.
오늘 행복하고 싶다면 오늘 뭐 하나 배워보자.
그러면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