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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Oct 05. 2022

밥 한 끼 짓는 데도 정성을 들여야 한다


지금이야 매일 식사 때마다 보이는 것이지만 내 어렸을 적에 흰쌀밥은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명절이나 잔칫날 혹은 초상 때나 먹을 수 있었다.

쌀이 참 귀했다.

더군다나 내 고향 제주도에서는 쌀이 생산되지 않았다.

화산지형이기 때문에 땅에 물이 고이지 않으니까 쌀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누리끼리한 보리밥이나 좁쌀만 잔뜩 들어간 조밥, 쌀 조금에 콩을 왕창 집어넣은 콩밥은 질리도록 많이 먹었다.

쌀이 부족하니 자연히 땅속 열매인 감자와 고구마도 많이 먹었다.

아메리카 대륙이 원산지인 감자는 유럽인들에게 밀 대용으로 주식이 되었고 1832년에 충남 보령 지역을 지나갔던 독일인 선교사 칼 귀츨라프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고 한다.

보릿고개가 심했던 시절이었기에 귀츨라프가 전해준 감자는 굉장한 인기를 누렸다.

땅에서 나오는 열매라는 뜻으로 ‘지실(地實)’이라 불렸다




감자가 제주도까지 내려가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 같다.

내 고향 제주도에서는 감자를 ‘지실’이라고 부른다.

이 사실을 모르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제주도에서 ‘감자’를 달라고 하면 ‘고구마’를 준다.

그러니까 제주도 방언에서 고구마는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육지 사람들이 감자와 고구마를 말한다면 제주도 사람들은 지실과 감자를 말한다.

어쨌든 이 감자와 고구마도 식량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흰쌀밥과는 견줄 수가 없었다.

가마솥 뚜껑을 열었을 때 물씬 풍겨오는 쌀밥의 그 달콤하고 찰진 냄새는 잊을 수가 없다.

늘 보리밥에 익숙했던 오장육부가 흥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때깔 좋지, 맛 좋지, 쌀밥은 언제나 환상이었다.

쌀밥의 그 하얀 색깔이 얼마나 고왔는지 제주도 사람들은 쌀밥을 ‘곤밥’이라고 불렀다.

‘고운 밥’을 줄여서 발음한 것이다.

그 시절의 우리는 평생 곤밥만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느 날 방과 후에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었는데 동네 쌀집 형이 누런 종이봉투에 쌀을 잔뜩 담아 가지고 와서는 오드득 오드득 씹어 먹었다.

좀 달라고 했더니 아주 조금 나눠줬다.

그래도 그 하얀 쌀을 입에 넣어 오드득 씹어 먹었을 때의 소리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런데 생쌀을 그렇게 씹어 먹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소화가 자 안 되기 때문이다.

조금 먹는 것이야 괜찮겠지만 많이 먹으면 배탈이나 설사가 날 수 있다.

왜냐하면 쌀의 주성분이 전분인데 이 전분은 물에 잘 녹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몸속에 들어가더라도 위액이나 수분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소화가 되지 않는다.

전분을 우리 몸에 잘 받아들이게 하려면 물에 섞어서 불에 익혀야 한다.

강제적으로 전분 속에 뜨거운 물이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밥을 만들어서 먹어야 한다.

이 작업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밥을 한다’고 말하지 않고 ‘밥을 짓는다’고 한다.




밥을 짓는다는 말 속에서 우리 조상들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다.

밥 한 사발에도 엄청난 정성을 들였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밥을 할 때 물이 부족하면 쌀이 익지 않으므로 전분을 먹게 되고 그러면 배탈이 난다.

밥을 망친 것이다.

만약 물이 너무 많으면 밥이 아니라 죽이 되고 만다.

그러면 쌀밥의 맛을 느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밥을 지을 때는 물의 양을 맞추는 것부터 신경 써야 한다.

솥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손등까지 물이 차오르게 붓는 게 실력이다.

이제 불을 때면 솥 안에서 끓은 물이 쌀 알갱이 속으로 들어간다.

이때 솥바닥에 물이 남아 있지 않고 모든 물들이 쌀 알갱이 속으로 들어가게 해야 한다.

그 시간을 뜸 들이는 시간이라고 한다.

충분히 뜸을 들이면 밥알이 맑고 영롱한 빛을 띠며 물기에 젖어 탱탱하게 된다.

밥 한끼 짓는 데도 이렇게 정성을 들인다면 우리 인생을 짓는 데는 얼마나 정성을 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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