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중간고사 시험을 치렀는데 영어는 100점을 맞았고 수학은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는 받아보지 못한 점수를 받았다.
그래도 시험 끝나서 좋다며 친구와 함께 에버랜드에 가서 폐장할 때까지 놀고 왔다.
갑자기 내 중학생 때 두 번째 월례고사 생각이 났다.
첫 월례고사에서 영어 100점을 받았는데 두 번째 월례고사에서는 80점대를 받았던 것 같다.
성적표를 보여드리며 엄청 울었다.
내가 멍청해진 것 같아서 너무 속상했다.
다음 시험에는 열심히 준비하리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다음 시험에서도 맘에 안 드는 점수가 나온 과목이 있었다.
이런 일은 시험 볼 때마다 반복되었다.
고등학생 때 우리 반에 전 과목을 거의 만점 받는 친구가 있었다.
괴물 같은 놈이었다.
그 친구는 시험지만 보면 만점이었다.
하지만 특이한 모습이 보였다.
시험지가 없는 시험에서는 만점이 안 나왔다.
음악, 미술, 체육 실기 시험 같은 경우였다.
평상시에는 선생님들도 공부 잘하는 친구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가르치는 교사 입장에서 학생이 좋은 성적을 내면 그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일찍이 맹자 선생도 그렇게 말했다.
맹자 진심편에 군자에게는 3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했다.
그중의 하나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그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선생님들에게는 공부 잘하는 똑똑한 학생이 있으면 그만한 즐거움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있었다.
체육대회 때에는 공부 잘하는 친구보다 운동 잘하는 친구가 인기 최고다.
우리 반의 영웅은 수석 하는 친구가 아니라 달리기 잘하는 친구였다.
친구들끼리 싸움이 났을 때는 그 중간에 끼어들어서 화해시키는 친구가 제일이었다.
소풍날이나 수학여행 때는 끼가 많아서 모두를 웃게 만드는 친구가 인기 만점이었다.
그 친구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가 없는 천재였다.
시험 점수로만 평가하기에는 사람이 너무 복잡한 존재이다.
시험지 앞에서 똑똑한 친구가 있고 운동장에서 똑똑한 친구가 있다.
글을 쓰라면 주눅이 들지만 무대에만 올라가면 날아다니는 친구도 있다.
공부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데 친구들끼리 모일 때면 항상 끼는 친구도 있다.
그 친구가 없으면 모임이 되지 않는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겠다.
선생님은 공부를 잘해야 잘 살아갈 수 있다고 가르치셨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선생님 말씀이 정답은 아닌 것 같다.
꼭 공부를 잘해야 잘 사는 것은 아니다.
공부머리가 발달한 사람은 공부를 잘하게 되는 것이고 일머리가 좋은 사람은 일을 잘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머리가 어느 쪽으로 발달되어 있는지 파악하고 그쪽으로 계발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내 머리를 분석해 보면 나는 공부머리와 일머리가 반반인 것 같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ener) 교수는 인간의 지적능력은 공부 잘하는 것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능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다중지능이론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대인지능, 자연지능, 개인내지능, 공간지능, 언어지능, 신체운동지능, 논리수학지능, 음악지능 등, 적어도 8가지 영역의 지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염두에 둔다면 시험 성적이 안 좋다고 해서 아이의 지능이 안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특별한 지능이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시험 점수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아이의 지능 전체를 평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점수가 안 좋게 나왔다고 해서 시무룩하게 지냈던 중학생 때의 나보다 수학시험을 망쳤어도 친구와 신나게 놀고 온 내 아들이 훨씬 똑똑한 것인지 모른다.
옛 어른들이 그랬다.
사람마다 제 밥그릇은 다 챙겨서 태어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