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은석 Nov 02. 2022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1993년 1월이었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을 맞아 잠시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서울 생활에 제대로 적응되어 있었기에 한두 주 집에 있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려고 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랬는지 아버지 어머니와 이러저러한 이야기도 나누었었다.

사실 그전까지는 아버지와 살갑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나에게 아버지는 늘 어려운 존재이셨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나를 어려워하셨을 것이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하셨던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아버지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는 항상 흔들거렸다.

그런데 그때는 달랐다.

아버지와 겸상을 하면서 식사를 하고 농담도 했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아침에 라면을 끓여서 같이 먹자고 하셨다.

둘이서 맛있게 먹으면서 나는 6년 정도 지나면 아버지 품에 손주 하나 안겨드릴 거라고 했다.

식사 후에 아버지는 마실을 나가셨고 나는 친구를 집으로 불렀다.




한 시간쯤 후에 동네 슈퍼에서 아버지가 방금 쓰러지셨다고 전화가 왔다.

친구와 함께 슈퍼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덜덜 떨고 계셨다.

뇌출혈이었다.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인한 뇌졸중을 앓고 계셨다.

의사는 돼지고기, 닭고기, 인스턴트 음식을 피하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집에 오니까 나랑 같이 식사하시려고 삼겹살도 드셨고 라면도 드셨다.

급히 119에 연락을 했다.

뇌출혈로 쓰러진 사람에게는 빨리 피를 뽑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었다.

열 손가락을 따서 피를 뽑으면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급히 바늘을 찾았다.

하지만 슈퍼 주인은 바늘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를 못했다.

면도날이 보이길래 그거라도 달라고 해서 아버지의 엄지손가락을 베었다.

피가 뿜어져 나왔다.

피를 봐서 그런지 순간 무서웠다.

다른 손가락도 피를 냈어야 했는데 더 이상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구급차는 금방 왔다.

하지만 골든타임을 놓쳤다.

아버지는 12일 동안 병실에 계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12일 동안 그리고 아버지를 떠나보내고서도 한동안 나는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었다.

내가 그때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식단 조절을 잘하셨을 것이다.

돼지고기도 안 드시고 라면도 안 드시고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나 때문에 뇌졸중 환자가 피해야 할 그 음식을 잡수신 것이다.

나와 함께 식사하시려고 그러신 것이다.

내가 슈퍼에 가서 재빨리 열 손가락을 다 따드렸다면 혈압이 내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무섭다고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미련하게 구급차가 올 때까지 넋을 놓고 있었다.

내가 고혈압과 뇌졸중 환자에 대한 응급처치 방법을 조금이라도 배웠더라면 그렇게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았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 때문이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마음의 죄책감을 이겨낼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내 잘못 이 아니었다.

운명이란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Peace of Mind>라는 책으로 유명한 유대교 랍비 조슈아 리브먼(Joshua Loth Liebman)이 한 말이 있다.

“살면서 당하는 모든 불안과 문제들을 모두 내 책임으로 짊어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런 것에 집착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지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잘못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고 자책하고 있다.

‘그때 거기에 가지 말자고 한 번만 말렸더라면’, 

‘그때 거기에 가자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깊은 슬픔 속에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건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들도 당신들을 탓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때 그렇게 한 건 사랑이었다고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것만은 반드시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