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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Oct 31. 2022

이것만은 반드시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1392년에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폐하고 조선을 열었다.

당시 유학을 공부한 신진 사대부들이 이성계의 편에 많이 가담하였다.

그들은 조선 개국 후에 공신의 지위를 얻었고 새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고려 말기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 외교적으로나 파탄 지경이었다.

왕실이 흔들리는데 백성들의 삶이라고 평안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역성혁명에 가담한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회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한반도의 안정을 꾀하려고 하였다.

이성계의 동지요 멘토라고 할 수 있는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의 핵심은 ‘인심은 곳간에서 나오고 천심은 백성들의 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만큼 지도자들은 사리사욕을 부리지 말고 자기 자신을 먼저 잘 다스려야 하며, 또한 백성들의 사정을 잘 헤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 왕조가 역동적인 출발을 하자 백성들도 많은 호응을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망해버린 나라였을지라도 고려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신하들도 많았다.

고려말의 신진 사대부라고 해서 모두가 이성계를 따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몽주와 길재, 최영 같은 인사들은 밖으로부터의 개혁이 아닌 고려 안에서의 개혁을 꿈꿨다.

힘들기는 하지만 고려가 충분히 개혁할 수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진 상태였다.

이성계 편에서는 자신들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 이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고려 왕실의 성씨인 왕씨 성을 가진 이들이 타격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全)씨, 옥(玉)씨 등으로 성을 바꾸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많았던 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줄어들었고 이제는 김씨, 이씨,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보다 숫자가 적게 되었다고 한다.




신진 사대부들 중에서도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려고 했던 이들은 모진 시련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관직이 있었던 이들은 그 관직을 박탈당하였고 재산이 있던 이들은 재산도 빼앗겼다.

목숨을 건졌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할 정도였을 것이다.

망해버린 고려에 대한 연민을 버리고 이제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자는 회유가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한두 번은 굳은 의지를 가지고 그런 말들에 대해서 단호하게 물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반복되는 말을 듣다 보면 마음이 흔들린다.

그들도 자신들의 마음이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예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으려고 작심을 하였다.

그렇게 뜻을 모은 사람들이 72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그들을 끄집어내려고 그 지역에 불을 질렀지만 그들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지역을 두문동(杜門洞)이라고 불렀다.




두문(杜門).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고 문을 걸어 잠갔다는 말이다.

세상이 요동을 치지만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지내겠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그렇게 골짜기에 들어가면 먹고살기도 힘들 텐데 그들은 일부러 그 험난한 인생길을 택했다.

일반적으로 보면 완전히 망한 인생이다.

실패한 삶이다.

루저들만 모인 것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으니까 골짜기에 틀어박혀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고 한다.

그들을 향해 비아냥거리던 말이 고사성어처럼 굳어버렸다.

그러나 그들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단정 짓지는 못할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보고 싶다.

그들은 자신이 배우고 익힌 것, 자신이 믿고 신뢰하는 것, 자신의 양심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골짜기를 찾아간 것이다.

나에게도 그만큼 절실히 지키고 싶은 것이 있나 되돌아본다.

문을 걸어 잠그고서라도 이것만은 반드시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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