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만남이란 게 참 신기하다.
나는 제주도 한라산 중산간 마을의 시골뜨기였는데 동갑내기인 서울 토박이 아내를 만났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세상에 많고 많은 남자 중에 아내는 나를 남편으로 맞았고 세상에 많고 많은 여자 중에 나는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고 전혀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만나 한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걸 생각해 보면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나중에 그 사람과 한자리에 앉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알고 보면 그 사람이 내 친구의 친구일 수도 있고 내 사돈의 팔촌일 수도 있다.
사람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하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또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이니까 사람을 알려면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김춘수는 <꽃>이란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고 했다.
그 사람을 몰랐을 때는 그 사람이 내 앞에 와도 하나의 움직임밖에 안 되었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을 알게 되자 그 사람은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살아가면서 맺게 되는 인간관계가 다 이와 같은 성격을 지니는 것 같다.
모르고 보면 별것 아닌 관계인데 알고 보면 매우 중요한 관계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란 시를 좋아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이 짧은 시구 속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다 녹아 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만나는 것이다.
서양 음악의 역사를 보면 먼저 살았던 음악가를 더 깊이 알기 위해서 그의 작품들을 하나씩 찾아내었던 이들이 있다.
독일의 멘델스존은 자기보다 100년이나 먼저 살았던 바흐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그가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영화로도 각색되어 <바흐 이전의 침묵>이라는 작품으로 나오기도 했다.
어쨌든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의 아들인 멘델스존 덕분에 바흐의 음악이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멘델스존 못지않게 바흐도 자기보다 한 세대 이전의 음악가를 발견하여 그의 음악을 알리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바흐가 찾아낸 인물은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이다.
가톨릭 신부였지만 바이올린 연주가로 그리고 작곡가로 더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비발디의 작품들은 주로 바이올린을 위한 연주곡이었는데 바흐가 그것을 건반악기 연주곡으로 편곡하여 대중에게 알려준 것이다.
바흐가 비발디를 찾아내지 않았다면 비발디는 이탈리아의 교회 음악가 중의 한 사람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멘델스존이 바흐를 찾아내지 않았다면 바흐는 독일의 교회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남들은 몰라보았던 대 음악가를 멘델스존은 알아보았고, 바흐도 알아보았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면 환승역에 내릴 때 울려 퍼지는 음악이 있다.
비발디의 <조화의 영감>이라는 곡인데 이 곡도 바흐가 발견하여 피아노 연주곡으로 편곡하였다고 한다.
비발디를 바흐가 발견하고 바흐를 멘델스존이 발견하였기 때문에 오늘 내가 비발디의 <조화의 영감>을 바흐가 편곡한 음악으로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과 같이 나에게도 인생의 대가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
아니, 어쩌면 이미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대단한 인물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Op. 3 No.6 <조화의 영감> 한번 들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