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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의 사계처럼 따뜻했던 겨울

by 박은석

몸이 피곤하여 딱히 뭘 하기가 싫을 때가 있다.

밖에 나가기도 귀찮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내키지 않을 때가 있다.

넷플릭스에서 볼만한 영화가 있나 뒤져보지만 마땅한 게 없다.

그럴 때는 그냥 클래식 음악 하나 틀고 밀리의 서재에서 적당한 책 한 권 골라 책 읽어주는 서비스(TTS)를 받는다.

이렇게 소개해보면 굉장히 고상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으니 잘 알려진 음악가의 음악 중에서 아무 거나 고른다.

그래도 음악 고르기가 여의치 않을 때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비발디의 <사계>다.

내가 알기에 <사계>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많이 듣는 클래식 음악일 것이다.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이 음악만큼은 잘 안다고 큰소리친다.

시골 할머니도 휴대폰 벨소리 설정을 하다가 얼떨결에 이 음악을 택하기도 한다.

나도 중학생 대 이후로 이 음악을 참 많이도 들어왔다.




사계(四季)니까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을 노래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도 미 미 미 레도 솔 솔파 미 미 미 레도 솔’로 시작하는 ‘봄’의 노래를 가장 많이 들었을 것이다.

대학 신입생 때 학교 교정에 울려 퍼지던 음악도 <사계>의 봄이었다.

그 선율만 흘러나오면 봄날의 희망이 다시 생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계>는 봄을 듣는 것만으로도 잘 들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사계>의 전 악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보고픈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한번 감상해보기로 했다.

감사하게도 내 컴퓨터에 카라얀이 지휘한 베를린필하모닉의 <사계> 연주 영상이 저장되어 있었다.

스피커 볼륨을 맞추고 연주회 시작 버튼을 눌렀다.

돈이 있어도 가기가 쉽지 않고 시간이 있어도 관람권 한 장 얻기가 쉽지 않은데 집에서 언제든지 들을 수 있으니 나로서는 큰 행운이다.

이게 바로 나 혼자서 즐기는 사치이다.




솔직히 봄의 음악 앞부분만 익숙했을 뿐, 나머지 음악들은 몰랐었다.

클래식 음악은 배경음악 정도로만 생각했었기에 깊이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니 “이것도 <사계> 중의 한 곡이에요.”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때도 그랬다.

언제 여름의 곡이 시작되었는지 언제 가을의 곡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 채 연주회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음악을 잘 아는 사람들이야 이제 1악장이 끝나고 2악장이 시작된다고 감을 잡을 텐데 나는 그런 것도 몰랐다.

그런데 ‘아! 이게 겨울이구나!’ 하는 느낌이 오는 순간이 있었다.

찬바람이 거세게 불고 눈보라가 날리는 바깥에서 추위를 피하려고 급하게 달려가는 느낌이랄까?

그런 거친 호흡이 한 마디 끝났다.

따뜻한 집에 도착해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아랫목으로 슈욱 들어갔을 때의 느낌이 들었다.

<사게> 겨울의 2악장이었다.

차분한 선율이 ‘이제 살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 그랬다.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을 때도, 추위에 온몸이 얼어붙었을 때도 우리를 따뜻하게 해 주었던 겨울이었다.

나 혼자만 있었으면 전혀 온기를 느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서 오라며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셨던 어머니가 계셨고, 수고했다며 다사롭게 맞아주었던 가족들이 있었다.

난롯가에 앉아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벌거스름해진 얼굴로 웃고 떠들던 친구들이 있었다.

겨울은 분명 추운 계절이었지만 추웠기 때문에 더 많이 따뜻했던 계절이기도 했다.

이제 그 시절 젊었던 어머니의 모습도 간데없고,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허물없이 어울렸던 친구들도 각자의 삶의 길로 나았고 따뜻한 온기를 주던 난로도 사라졌다.

열정적으로 연주했던 카라얀도 갔고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했던 필하모닉의 단원들도 갔다.

이제 다시 겨울의 찬바람이 불어올 텐데 한 세대를 뜨겁게 달궜던 그들의 자리를 누가 대신하려나?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사계> 연주-

https://music.youtube.com/watch?v=PXqZF288zYE&feature=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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