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버텼다면 한 해를 성공한 것이다

by 박은석


다시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해와 비교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작년에 살던 집에서 살고 있고 작년에 일하던 데에서 일하고 있고 작년에 만났던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굳이 달라진 점을 찾는다면 뱃살이 조금 늘었고 흰머리가 많아졌으며 앞날에 대한 걱정이 깊어졌다는 것을 꼽을 수 있겠다.

이번 해에는 뭔가 색다른 일이 있을 거라고 기대를 가져보았는데 그리 큰 변화는 없었다.

11개월이 지나고 12개월째에 접어들었는데도 그렇다.

그제와 비슷한 어제를 살았고 어제와 비슷한 오늘을 살고 있다.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도 이런 심정일 것이다.

힘껏 돌렸는데 또 돌려야 할 것이 나오고 또 돌리고 돌리는데 제자리이다.

한때는 다음에 돌릴 발판을 기다렸을 것이다.

자기 힘을 느끼고 싶었고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한 살 더 먹으면 더 세질 것이라며 손을 꼽아가며 기다리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시간이 가는 것이 달갑지 않고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잘 견뎌왔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되려나 하는 불안감이 생기고부터이다.

큰길 사거리에서 이정표를 보고 있기는 하지만 어느 길을 가야 할지 모르는 당혹스러움이 생겼다.

예전에는 없던 증세였는데 이 나이쯤에 오면 생기는 증세인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 길을 열심히 잘 가는 것 같은데 나 혼자만 길을 잃은 것 같다.

혹시 나처럼 길을 헤매는 사람이 보이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안도감이 든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자주 보이지는 않는다.

신호등의 불빛은 바뀌었는데 건너가지는 않고 왔던 길로 되돌아섰다가 다시 횡단보도로 향하다가 하면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엄마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힘껏 뛰어가는 아이가 부럽다.

적어도 그 아이는 자기가 가야 할 방향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아무도 걸어보지 않은 허허벌판을 걸어가는 것만 같다.

길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모두 풀밭이다.

어렸을 적에 이런 곳을 걸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길을 찾느라고 고생을 했었다.

이런 곳에도 길이 있을까 불안해했던 생각이 난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곳에는 길이 없었다.

원래부터 길 같은 것은 없고 그냥 벌판이었다.

짐승들이 지나다니는 길은 있었는데 그 길은 나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길이 없었던 게 맞다.

그런데 길 없는 그곳을 용케도 빠져나왔다.

지도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침반을 챙긴 것도 아니었다.

북극성을 보면서 내 위치를 파악했던 것도 아니었다.

어찌어찌 걷다 보니까 깊은 늪과 같은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 그곳에 다시 갔을 때는 처음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이전에 걸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대로 걸으려고 했다.

예전보다 훨씬 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빨리 걷는 게 능사가 아니다.

시간이 좀 많이 걸리더라도 숲을 빠져나오는 게 중요하다.

괜히 이쪽으로 저쪽으로 뛰어다니다가 기력을 다 빼버리면 안 된다.

배고프다고 배낭에 있는 간식을 다 먹어서는 안 된다.

목마르다고 물통의 물을 다 마셔서도 안 된다.

천천히 움직일 줄도 알아야 하고 어쩌면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어야 한다.

남들보다 뒤처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굼뜬 행동이라고 자책해서도 안 된다.

무사히 살아 있으면 되는 거다.

살아 있기만 하면 성공하는 거다.

어찌어찌 내 발로 걸어서 숲을 나오는 것도 성공하는 것이고 구조대를 만나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숲을 나오는 것도 성공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다행이다.

한 해의 끝자락에 와서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겠다.

적어도 나는 이 한 해를 버텼다.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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