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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Dec 16. 2022

나의 등을 밟고 지나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쯔빙글리가 어느 날 좁은 산길을 가는 중에 염소 두 마리가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한 마리는 산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중이었고 또 다른 한 마리는 산 위에서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워낙 좁은 길이어서 누구 하나 비켜설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자칫 발을 헛디디기라도 한다면 낭떠러지로 곤두박질할 수 있었다.

염소들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서로 맞서서 팽팽하게 노려보고만 있었다.

쯔빙글리는 둘이 곧 싸움박질할 줄 알았다.

힘센 녀석이 약한 녀석을 낭떠러지로 떨어뜨리고 유유히 그 길을 지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잠시 뒤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산 위로 올라가려던 염소가 갑자기 길바닥에 납작 엎드린 것이다.

그리고 그 엎드린 염소의 등을 밟고서 산 위쪽에 있던 염소가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위쪽에 있던 염소가 자신의 등을 밟고 지나가자 엎드렸던 염소가 일어나서 산 위로 올라갔다.




우연히 염소들의 모습을 지켜본 쯔빙글리는 깊은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누가 보더라도 두 마리가 온전히 살아서 지나갈 수 없는 길이었다.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둘이 치고받으면서 싸울 것이 뻔해 보였다.

두 마리가 동시에 뿔을 높이 쳐들고 앞으로 돌진했다면 둘 다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살아 보려고 길을 나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이 될 뿐이다.

너 죽고 나 죽자는 결과만 나왔을 것이다.

염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싸우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서로 살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상대방을 위해서 먼저 엎드렸다.

자존심이 구겨지는 일처럼 보였을지 그게 둘 다 사는 방법이었다.

쯔빙글리가 본 때는 아래에 있던 염소가 엎드렸지만 다른 때는 위에 있는 염소가 엎드리기도 했을 것이다.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모르지만 염소들은 상대방을 위해 엎드리는 것이 둘 다 사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도 좁디좁은 외길을 걸어가고 있다.

내가 걸어가는 그 길 맞은편에 누군가 걸어온다.

우리는 그를 경쟁자로 본다.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는데 점점 더 다가오면 그에게 길을 비키라고 소리친다.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고 외친다.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만 비키라고 한다.

나는 피할 수 없다고만 한다.

지금까지 그 길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상대방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관심에도 없다.

단지 내 앞길이 훤히 뚫린 것에 만족할 뿐이다.

살아남았으면 기분도 좋아야 하는데 뭔가 찜찜하다.

나만 혼자 덩그러니 남았기 때문이다.

전우익 선생의 시처럼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생각난다.

차라리 염소처럼 살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내가 먼저 등을 내밀었다면 나도 살고 그도 살았을 것이다.

혼자 사는 것보다 둘이 사는 게 더 재미있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상대방을 밀치고 길을 독차지하기보다 상대방을 살리고 나도 살도록 등을 내주며 살아야겠다.

상대방에게 내 등을 밟고 지나가라고 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도 있다.

내가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행위일 수 있다.

한 번 등을 보이면 다음부터도 계속 나에게 등을 보이라고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괜히 나만 손해 보는 일인 것 같다.

나 살기도 바쁜데 다른 사람들까지 생각해줄 필요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내 앞에 엎드려주었던 사람이 없었다면 나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아낌없이 등을 내보이신 어머니, 아버지가 없었다면 내가 살았을까?

내가 지식을 쌓을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 선생님이 없었다면 내가 세상에 대해서 뭐 한 가지라도 알았을까?

시간을 내서 나의 고민을 들어주고 나와 함께 웃고 울었던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도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등을 내준 그들 때문에 내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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