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주고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by 박은석


나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많이 베푸는 사람이다.

내가 자신 있게 나를 이렇게 소개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인데 남들은 좀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으면 누가 시키지도, 부탁하지도 않는데 내가 팔 벗고 나섰다.

대가를 바라는 마음은 없었다.

그냥 고맙다는 말 한마디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렇게 인정을 많이 베푸는 성격은 아마 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다.

아버지를 닮아서 살지는 않겠다고 작심을 했었는데 살면 살수록 더 아버지를 닮아간다는 걸 느낀다.

그런데 이렇게 남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다가도 어느 순간 그 사람과의 관계를 뚝 끊어버릴 때가 있다.

내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 나에게 너무 인색하게 굴 때이다.

나의 이런 성격이 결코 좋지 않다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나에게서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남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은혜를 끼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나도 대가를 바라고 있었다.

그걸 마음속에 숨기고 있었을 뿐이지 나도 속물근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베풀어주는 인정에 대해서 고마워하는 표시를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마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그걸 알아차렸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우연히 다산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다가 속이 뜨끔거렸다.

정조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권력은 정약용이 소속된 남인들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천주교인들에 대한 핍박이란 명목으로 정약용의 가문을 풍비박산 내고 말았다.

다산의 4형제 중 셋째 형인 정약종은 사형을 당했고, 둘째 형인 정약전과 넷째인 다산은 유배형을 받았다.

큰형 정약현은 살아남았지만 그 사위인 황사영이 사형을 받았고 딸과 손주들은 유배형을 받았다.

순식간에 다산의 가문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겨버리고 말았다.




지난날 아버지와 삼촌들이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때는 뻔질나게 찾아왔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 몰라라 하는 것을 보고 다산의 아들들이 아버지께 하소연하듯이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읽은 다산은 아들들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 답장의 글을 읽는데 내 마음이 뜨끔해진 것이다.


“너희들은 편지에서 일가친척들이 너희를 돌봐주고 긍휼히 여겨 주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는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말이니 정말 큰 문제다. 너희들이 오늘날 이렇게 쇠잔하고 망가진 처지이기는 하나 여러 친척들에 비하면 오히려 부유하다 할 것이다. 친척 중에 며칠째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이를 도와주었느냐? 추워하는 이에게 땔나무 한 묶음이라도 나누어 주었느냐? 병든 이에게 약값이라도 보태주었느냐? 남에게 베풀지 않으면서 남이 먼저 나에게 베풀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희 안의 거만한 뿌리가 아직도 뽑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다산은 아들들에게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은혜를 끼치지 못하더라도 그러려니 이해하고 넘어가라고 했다.


“남들이 너희에게 은혜를 갚지 못하더라도 너희는 절대 마음에 한을 품지 말고 오로지 너그럽게 용서해라.

그에게 사정이 생겨서 너희를 도와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라. ‘나는 전에 그에게 이렇게 저렇게 도와주었는데 그는 나를 도와주지 않는구나!’라는 말을 절대로 하지 말아라. 이런 말을 한 번이라도 하면 그동안 쌓아놓은 공덕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리는 것과 같다.”


윤성희의 <다산의 철학>에 언급되어 있는 내용이다.

이 글을 읽는데 내가 꼭 다산의 아들들처럼 투덜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산이 아버지처럼 나에게 “이놈아!”하고 야단을 치시는 것 같았다.

은혜를 끼쳤으면 잊어버려야 한다.

자꾸 생각하면 대가를 바라게 된다.

은혜는 주고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9791191393361.jpg
은혜는 주고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다001.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