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정채봉 선생의 시를 되뇌고 있다.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인생이었지>라는 시다.
왜 이 시를 떠올렸냐면 내가 계속 생각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하루에도 수많은 생각을 한다.
그 많은 생각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하나의 행동을 하고 또 하나의 생각을 택하여 또 하나의 행동을 한다.
그러니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은 생각의 결과이다.
아무 생각 없이 일이 벌어졌다고 하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프랑스의 작가 폴 부르제(Paul Bourget, 1852~1935)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One must live the way one thinks or end up thinking the way one lived.)”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내가 보기에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다들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저렇게 사는 것이다.
단지 폴 부르제가 말하고자 하는 ‘생각’의 의미가 무엇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어쨌거나 나도 하루 종일 생각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깊이를 더해갔다.
생각을 멈추려고 해도 조금 있으면 또 생각이 났다.
그러기를 몇 시간째 이어오고 있다가 정채봉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이것도 하나의 생각이었다.
생각해보니 선생이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난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 중에 일찍 떠난 사람이 참 많은데 아마 하나님도 그 사람들을 일찍 보고 싶으셨던 것 같다.
선생의 시는 무척 짧다.
그래서 외우기도 쉽다.
하지만 무척 강렬한 인상을 준다.
몇 글자 안 되는 시구 속에서 ‘인생이란 이런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 같다.
“모래알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풀잎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너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어.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인생이었지.”
한 번 읽고 또 한 번 읽는다.
눈으로 읽기보다 소리를 내서 읊으면 그 소리가 가슴에도 울린다.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인생이었지.”라는 시구가 멋스럽게 느껴진다.
정채봉 선생은 이 시를 쓰면서 누구를 생각하고 있었을까?
시인이 ‘너’라고 불렀던 대상이 누구였을까?
사랑하는 연인? 가족? 친구? 아니면 그가 믿었던 하나님?
정채봉 선생의 ‘너’가 누구인지는 굳이 찾아보고 싶지 않다.
단지 나에게 ‘너’가 누구인지 생각해볼 뿐이다.
모래알 하나를 보고도 떠 오르는 생각은 무엇일까?
풀잎 하나를 보더라도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일까?
진종일 내가 떠올렸던 생각이 무엇일까?
그 생각이 나를 만든다.
내가 소망하는 꿈이 자꾸 생각이 나면 나는 그 꿈을 좇아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일의 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야 할지, 생각에 생각이 이어진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 그 꿈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어느덧 그런 삶을 살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꾸 생각이 나면 나는 그 사람에게 속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어디쯤에 오고 있는지,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이 다 그 사람 같고,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가 다 그 사람의 목소리같이 들린다.
내 생각은 그 사람에게 온통 빠져서 헤어 나올 줄을 모른다.
그런 사람에게 그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버린다면 삶이 통째로 사라져버리는 것과 같다.
로미오와 줄리엣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정채봉 선생의 시를 읊다 보면 이런 애틋하고 흐뭇하고 즐거운 생각이 떠오르는데 하루 종일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생각들은 내 마음을 긴장시켰고 내 뒷목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생각의 차이가 이렇게 내 몸과 마음까지도 다르게 만든다.
오늘은 이렇게 지나갔다.
오늘의 생각은 오늘의 생각으로 마무리를 짓자.
이제 잠자리에 들면 생각도 잠시 멈출 것이다.
그리고 내일은 좋은 생각으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