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기고 질긴 제주 4∙3의 기억

by 박은석


휴대폰 액정에 ‘어머니’라는 메시지가 떴다.

내가 전화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머니가 먼저 전화를 할 때면 가슴이 한 번 쿵 울린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궁금증이 인다.

어제저녁에 전화를 드렸었는데 스물네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전화를 했다는 건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어제는 밝았었는데 스물네 시간이 지나지도 않아서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어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듯이 말씀을 이어가셨다.

동사무소에 갔었는데 제주 4∙3 희생자 유족들에게 보상금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나 싶었다.

어머니의 친정 쪽으로는 오히려 제주도에 들어온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큰 외할아버지께서 산 채로 매장당하셨다.

목사님이셨는데 공산주의가 잘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라는 협박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셨다.

1948년의 일이다.




제주 4∙3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어였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4∙3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단지 그때 많이 죽었다는 이야기만 했다.

내가 자라올 때는 ‘4∙3 사건’이라고 했다.

그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여파가 얼마나 참혹했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 아버지가 나에게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는 그때 열 살이었는데 동네에서 형님 동생 하면서 지내던 사람들끼리 어느 날 갑자기 죽창을 들고 서로 싸웠다고 했다.

아버지의 엉덩짝에도 죽창에 찔린 흔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도 있다.

낮에는 군인과 경찰들을 피해서 한라산 쪽으로 도망갔고, 밤에는 공산주의자들을 피해서 마을로 내려오기를 반복했다고 하셨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의 남동생과 여동생이 굶어 죽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하시던 아버지도, 할머니도, 다 지나간 일인 듯 덤덤하게 말씀하셨다.

그땐 그런 줄 알았다.




6촌 형님 중에 하나가 학군단(ROTC)에 지원을 했는데 신원조회에서 걸렸다고 했다.

가슴에 묻어두었던 4∙3의 이야기가 다시 어른들 사이에서 나돌았다.

연좌제에 걸린 것이라고 말들을 했다.

집안에 그 행방을 알지 못하는 친척도 있었다.

누구는 죽었을 거라고 했고 누구는 몰래 도망쳐서 일본으로 갔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생사를 몰랐다.

가짜 묘소를 하나 만들어 놓고 해마다 그 묘에 벌초를 했었다.

나도 학군단에 지원했는데 시험 보는 당일에 가지 않았다.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를 추천해줬던 선배에게 엄청 욕을 먹었다.

대학 졸업을 하면서 학사장교에 도전을 했다.

당시에는 장교 지망생이 적어서 미달될 때였으니까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다.

결과는 나 혼자 불합격이었다.

분명히 연좌제가 폐지되었다고 했는데 그때까지 유지되고 있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제주 4∙3은 나에게도 질긴 끈이었다.




이제는 다 잊은 줄 알았다.

내 고향 제주도 봉개에 4∙3 추모공원이 생겼다고 했는데 나와는 관계없는 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에게 다시 4∙3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증조할머니께서 그때 희생되셨다고!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반백이 되도록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어렴풋이 친척 형님이 그때 아버지 항렬의 어른들이 많이 목숨을 잃었다고는 했는데 그분들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어머니는 정부에서 희생자 후손들에게 보상을 한다고 하니 서류들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씁쓸했다.

대표로 한 사람만 받으면 되지 않냐고 했더니 4대 후손까지는 다 나눠준다고 한다.

돈을 준다고 하는데도 반갑지가 않았다.

켜켜이 숨겨두었던 이야기들을 아버지도 할머니도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남아 있는 어머니가 그 아픈 역사를 다시 떠올리고 있다.

언제쯤이면 그 아픔들이 깨끗이 치유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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