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은석 Sep 25. 2020

나는 혀가 짧은 사람입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처음 알았다. 그때 지역 MBC방송에서 주최하는 어린이 동요대회에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지금 생각해 보면 40대 후반의 남자 선생님이었던 것 같다. 음악은 정말 못하셨다. 음악시간이면 카세트를 가져와서 들려주셨던 분이다. 그러니 동요대회에 나가는 제자를 가르칠 수가 없었나 보다. 그래서 음악에 조금 더 재능이 있는 여자선생님께 부탁하셨던 것 같다. 낯선 선생님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반에서 노래 잘 한다고 칭찬받은 실력을 발휘하려고 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하신 한 마디 말씀이 나를 얼어붙게 했다. “너, 혀가 좀 짧은 거 같은데...” 그때 내가 혀 짧은 아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방송국에서 치러진 동요대회에서 장렬하게 떨어졌다.


잊힌 줄만 알았다. 한 번의 에피소드인 줄 알았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다시 한 번 내 혀가 짧다는 것을 일깨워주셨다. 영어선생님이셨다. 나 또한 공부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지라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 보려고 했다. 당시에는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교과서를 읽어보라고 시키는 일이 많았다.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왔다. 나름대로 집중해서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이 “너 혀가 좀 짧네.” 혀 짧으면 영어 발음도 시원치 않게 되는구나 생각했다. 점점 자신감이 사라졌다. 나는 영어를 못하는 아이라는 생각이 내 마음속에 메아리쳤다. 자연스레 영어 시간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오히려 수학이 훨씬 재미있었다. 수학은 혀가 짧아도, 소리를 내지 않아도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영어 과목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나는 발음이 시원치 않은 아이라는 생각에 외국어를 대할 때마다 엄청난 부담감이 몰려왔다. 고등학생 때 배웠던 독일어도, 대학생 때 2년이나 부전공으로 배웠던 중국어도, 3년 동안 인도네시아에서 살면서 익히려 했던 인니어도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고작해야 일상생활에서 쓰는 몇 마디가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어쩌다가 외국인을 만나게 되면 영어와 중국어, 그리고 인도네시아어까지 마구마구 뒤섞여 나온다. 그뿐만이 아니다. 혀가 짧으니 말을 빨리 하지 못한다. 입에서 혀가 꼬여버리는 일이 빈번하고 'ㄹ' 발음이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를 발음할 때는 혀가 제대로 놀려지지 않아 'ㄷ' 발음처럼 소리가 난다. 이런 것 때문에 애들에게 잠깐 놀림을 받기도 했었다.


그래서 가급적 천천히 말하고 더 정확히 발음하려고 한다. 한때는 볼펜을 입에 물고 발음 연습을 하면 좋아진다기에 오랫동안 그렇게 한 적도 있다. 혈소대 절개 수술을 하면 나아진다는 말에 많이 망설이기도 했다. 대학시절에는 혓바닥 좀 길게 해 달라고 하나님한테 간절하게 기도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혀 짧은 소리를 낸다. 내 목소리와 발음은 절대로 A급이 될 수가 없다. 최선을 다해도 B급 밖에 안 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의 부족하고 어눌한 발음 때문에 사람들은 내 말에 더욱 집중해서 귀를 기울인다. 천천히 말을 해서 더 이해하기 쉽다는 분들도 있다. 나의 형편없는 발음을 들으면서 용기를 얻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자신도 나처럼 부족한 면이 많은데 그 나름대로 쓰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를 갖는 것 같다. 혀 짧아 좋지는 않지만 혀 짧아도 쓸 모는 많다.

작가의 이전글 약함이 강함을 만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