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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Dec 25. 2022

아버지의 편지


1810년, 다산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에서 10년째 유배생활을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의 홍씨가 여섯 폭짜리 빛바랜 치마를 보내왔다.

그 치마는 부인 홍씨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붉은색 명주 치마였다.

다산은 15세 때인 1776년에 홍화보의 딸과 결혼했으니 그 치마는 벌써 서른다섯 살이 되었다.

마침 글을 쓸 종이가 절실했던 정약용은 그 치마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책처럼 묶었고 거기에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렇게 해서 치마로 만든 책이 탄생하였는데 정약용은 그 책을 ‘하피첩(霞帔帖)’이라고 불렀다.

‘하피’는 ‘노을빛 치마’라는 뜻이다.

나중에 두 아들이 하피첩을 보면서 부모의 자취를 생각한다면 마음이 뭉클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보내는 4권의 하피첩을 만들고 나서 다산은 남은 천으로 딸에게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새 두 마리와 시를 써서 주었다.

‘매조도(梅鳥圖)’이다.




하피첩에는 다산이 아들을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유배생활 중인 아비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정약용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근(勤)과 검(儉)을 준다고 했다.

그 두 글자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을 곁들였다.

부지런하고 검소하면 굶지도 않을뿐더러 사람들로부터 종경을 받을 것이라는 분명한 가르침이었다.

다산의 아들들에게 하피첩은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책이었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보관해왔던 치마에 아버지의 글씨가 새겨진 책이었다.

부모님의 분신과도 같은 책이었다.

그러니까 그 책을 애지중지하면서 보관했을 것이다.

실제로 하피첩은 정약용의 후손들에게 가보처럼 전해져 내려왔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1925년의 대홍수 때에는 물에 떠내려갈 뻔했었다.

한국전쟁 때는 피난길에서 그만 하피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시 50년이 넘도록 세월이 흘렀다.

사람들에게 하피첩의 존재는 완전히 잊혔다.

그런데 2004년 어느 날 경기도 수원의 주택 철거 현장에 폐지를 줍는 할머니가 나타났다.

건설 관계자 중의 한 명인 이모 씨가 할머니의 리어카에 오래된 책이 깔려 있는 걸 보았다.

고문서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왠지 그 책을 가지고 싶어서 할머니와 협상을 했다.

건설 현장의 폐지들을 줄 테니 그 책들을 자기에게 달라고 제안했다.

할머니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고 고문서 3권이 이 씨에게 건네졌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006년 4월에 그는 KBS <진품명품(珍品名品)>이라는 프로그램에 그 옛날 책이 얼마만큼의 값어치가 있는지 감정을 의뢰했다.

그는 한 15만 원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감정 결과 그 책이 바로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 원본으로 드러났다.

감정위원들은 그 책의 가격으로 1억 원이 넘는 금액을 제시했다.




얼마 후 <하피첩>은 고문서 수집가이자 부산저축은행 대표였던 김민영 씨에게 넘어갔고 2010년에는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김민영 씨가 운영하던 부산저축은행이 파산하면서 그의 재산이었던 하피첩은 예금보험공사에 압류되었다.

그리고 2015년에 경매가 성사되어 국립민속박물관에서 7억 5천만 원에 낙찰받았다.

이렇게 해서 하피첩은 다산의 두 아들에게만 들려진 편지가 아니라 우리 온 국민에게 들려주는 편지가 되었다.

얼마 전에도 어느 지자체에서 하피첩을 전시한다는 광고를 들은 적이 있다.

아직까지 내 두 눈으로 하피첩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보고 말 것이다.

글을 쓴 다산도 떠났고 글을 받은 두 아들 학연과 학유도 떠난 지 오래되었다.

받는 이가 모두 없어졌으니까 쓸모없는 글이 되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받는 이가 된 셈이다.

우리 모두에게 주는 아버지의 편지가 되었다.


++그림 출처 : https://shindonga.donga.com/3/all/13/3416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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