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내가 세상을 축복하기 때문이다

by 박은석


간호사로서 치열하게 살았던 분인데 10여 년 전에 불치의 병에 걸린 분을 만났다.

아직 환갑도 안 되었는데 몸이 점점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하늘이 원망스럽고 인생이 한탄스러울 만도 하다.

자신에게 왜 이런 병이 생겼을까 그 원인을 찾느라고 시간도 많이 보냈을 것이다.

괜히 천사처럼 착하게 살았던 게 병이 되었을 것이다.

악착같이 몸 사리지 않고 지냈던 날들이 병을 키웠을 것이다.

아픈데 아프지 않은 척 가족들을 열심히 돌보느라 병이 더 깊어졌을 것이다.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진 말 한마디 한마디가 독침처럼 그녀의 몸에 박혔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듯했는데 그게 모이고 모여서 몸을 굳게 하는 독이 되었을 것이다.

아픈 그녀를 환영하는 곳은 없었다.

그녀가 시간과 열정을 쏟아 헌신했던 직장은 그녀를 헌신짝처럼 내보냈다.

사람들도 그녀를 떠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병실에 홀로 남았다.




그녀와 나의 차이점이 있을까?

내가 그녀보다 젊고 건강하다는 것?

내가 남자이고 힘이 세다는 것?

내가 그녀보다 더 많이 공부했다는 것?

조금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걸 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미미하다.

오십 보 백 보이다.

그녀의 병실이 나의 병실이 될 수도 있고 그녀의 침상이 나의 침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픈 사람 앞에서 나는 멀쩡하다고 으스대서는 안 된다.

나도 언젠가는 아프게 될 것이고 언젠가는 자리에 누울 날이 있을 것이다.

병문안을 갈 때는 항상 이런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

누워 있는 환자와 서 있는 나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해 보는 거다.

자리를 바꿔서 내가 환자가 되고 환자가 나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그러면 환자를 대하기가 훨씬 편해진다.

나를 대하는 것처럼 대하면 되니까 말이다.

환자의 가족도 내 가족처럼 더 친근감 있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이 느껴진다.




언젠가 나보다 두어 살 많은 암 환자를 만난 적이 있다.

미치 앨봄의 책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처럼 매주 하루를 정해서 만났었다.

물론 그 만남이 몇 번밖에 되지는 않았다.

그때 그이도 오늘 만난 환자와 비슷한 마음 상태였다.

착하게 살았는데 왜 자신에게 그런 병이 생겼는지 원망스러워했다.

그 원망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그때그때 달랐다.

불치의 병을 만나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공통된 현상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원망하다가 나중에는 타협하고 받아들인다고 한다.

좋은 말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고 사실은 자신의 삶을 체념하고 점점 포기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 상태인 환자를 만나는 것은 무척 곤혹스러운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상태인 환자를 만나기 때문에 가슴 뭉클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 삶의 막바지에 이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삶의 막바지에 이른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라는 말이라고 한다.

실제로 내가 지켜봐도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그녀에게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라는 말로 축복을 하자고 권했다.

물론 자신의 인생을 망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이 나올 턱이 없다.

그러나 원망하면서 보내기에는 남아 있는 시간이 너무 짧다.

한탄하면서 보내기에는 인생이 너무 불쌍하다.

왜 삶이 이렇게 망가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그러지고 추한 모습만 보이는 것 같은 심정일 것이다.

천상병 시인은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면 삶이 참 아름다웠노라고 말하겠다고 노래했는데 이런 삶도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을까?

조심스러운 대답이지만 그렇다고 하겠다.

그 이유는 축복을 많이 베풀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나에게 세상이 아름답게 다가오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축복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 하겠다.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도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00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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