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감귤을 잘 안 먹는 이유는...

by 박은석


내 고향은 제주시 바닷가에서 한라산 쪽으로 5㎞쯤 올라간 지역이다.

거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목장 지대가 나오고 또 조금만 올라가면 한라산 밀림 지역이 나온다.

전형적인 제주도의 농촌마을이다.

물이 부족한 제주도에서는 고산 지역을 제외하고는 논농사를 지을 수 없다.

마늘, 당근, 파, 콩, 조, 보리가 농작물의 대세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 감귤 과수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정치계에서 ‘영원한 2인자’라 불리는 김종필씨가 일본에서 감귤 종자를 들여와서 제주도의 농가에 보급했다고 들었다.

1960년대의 일인데 당시 감귤은 매우 귀한 과일이어서 감귤나무 몇 그루만 있으면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감귤나무를 대학나무라고 불렀다.

김종필씨는 제주도 사람들을 돕기 위한 정책이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제주도에 땅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였다고 말들을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에서 감귤 종자를 들여오기 전에도 제주도에는 자생적인 감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산 감귤이 들어오면서 감귤의 이름이 세부적으로 나뉘어졌던 것 같다.

10월 말에 수확하기 시작하는 조생귤, 12월부터 수확하는 중생귤, 꽃피는 봄에 수확하는 만생귤 등으로 구분하였다.

추운 겨울을 지나기 위해서는 감귤도 두꺼운 옷을 입어야 했는지 조생귤보다는 중생귤이, 중생귤보다는 만생귤의 껍질이 훨씬 두꺼웠다.

어쨌든 우리는 10월 말부터 이듬해 3~4월에 이르기까지 원없이 귤을 먹었다.

귤 수확철이 되면 마을의 모든 어른들이 과수원에서 일을 했다.

품앗이 형태로 일이 진행된 것 같았고 때로는 일당 5천원, 1만원, 2만원의 금액을 주고받기도 했다.

제주도라고 해서 전 지역에서 감귤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다.

제주시에 속해 있으면서도 감귤농사를 짓는 지역은 내 고향 동네와 이웃마을들 정도였다.




겨울의 저녁은 빨리 찾아온다.

저녁 5시쯤 되면 해가 넘어가서 캄캄해지는데 그때쯤에 과수원에 가셨던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어머니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머리에는 수건을 두르셨고 몸빼바지를 입으셨고 등에는 감귤 한 보따리를 짊어지고 오셨다.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감귤은 하루종일 과수원에서 일한 사람들에게 한 나누어주는 게 우리 마을의 풍습이었다.

그때 어머니가 짊어지고 온 한 보따리의 감귤을 요즘의 과일가게에서 저울로 재본다면 10㎏은 족히 넘을 것 같다.

현관 앞에 보따리를 풀어놓으시면 우리 형제들은 오며 가며 감귤을 하나씩 까 먹었다.

오늘 가지고 온 감귤은 오늘 먹어야 했다.

내일은 내일의 감귤이 있었기 때문이다.

혹 이웃집에 놀러 가면 그 집에서 간식으로 내놓는 것도 감귤이었다.

11월 3째 주일인 추수감사절에 예배당에 가지고 가는 추수물도 감귤이 제일 많았다.

우리의 겨울은 감귤로 도배되었다.




스무 살 때 서울에 올라와서 가장 놀란 것 중의 하나가 감귤을 돈 주고 사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천 원어치를 달라고 하면 고작 서너 방울을 줬다.

고향에서는 공짜로 원없이 먹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게 이렇게 비싸게 팔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년내내 농사를 짓느라 등에 굽어진 아버지, 어머니는 너무나 헐값에 감귤을 팔아넘기고 만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비싼 가격에 팔리는 것을 보신다면 아마 엄청난 충격을 받으실 것 같았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감귤을 즐겨 먹지 않게 된 것이.

그전에는 두 손이 감귤색으로 노랗게 변하도록 실컷 먹었는데 돈 주고 사 먹어야 한다니까 갑자기 먹기가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누군가 옆에서 감귤을 권하면 자신 있게 이야기해 준다.

내가 어렸을 때 먹은 감귤의 양이 당신이 평생 먹을 양보다 훨씬 많았다고...

밥 한 끼 먹이고 떠나보내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다001.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