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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Jan 20. 2023

오랜만에 이정하 시인의 시를 꺼냈다


미술 작품들 중에는 같은 대상을 화가가 여러 번 그린 경우가 있다. 같은 제목이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 제목 끝에 숫자를 표기한다. 판화의 경우는 전체 몇 번을 찍었는지, 그중에서 몇 번째 찍힌 판화인지 분수처럼 표시한다. 123/500이라고 표시했다면 500번 찍었는데 그중에서 123번째 찍힌 작품이라는 것이다. 시인들 중에도 같은 제목으로 몇 편의 시를 연거푸 발표하는 이가 있다. 그때도 제목 뒤에 숫자를 붙인다. 오래전에 이정하 시인의 <바람 속을 걷는 법>이라는 시를 알게 되었다. 모두 다섯 편이었는데 어느 시든지 다 괜찮았다.     




<바람 속을 걷는 법 1>

바람이 불었다.

나는 비틀거렸고

함께 걸어주는 이가 그리웠다.     




<바람 속을 걷는 법 2>

바람 불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아니다.

그래. 산다는 것은

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바람이 약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바람 속을 헤쳐 나가는 것이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것

바람이 드셀수록 왜 연이 높이 나는지    



 

<바람 속을 걷는 법 3>

이른 아침, 냇가에 나가

흔들리는 풀꽃들을 보라

왜 흔들리는지, 하고많은 꽃들 중에

하필이면 왜 풀꽃으로 피어났는지

누구도 묻지 않고

다들 제자리에 서 있다.

이름조차 없지만 꽃필 땐

흐드러지게 핀다.

눈길 한번 안 주기에

내 멋대로, 내가 바로 세상의 중심

당당하게 핀다.     




<바람 속을 걷는 법 4>

그대여, 그립다는 말을 아십니까?

그 눈물겨운 흔들림을 아십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집 밖을 나섰습니다.

마땅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걷기라도 해야지 어쩌겠습니까?

함께 걸었던 길을 혼자서 걷는 것은

세상 무엇보다 싫었던 일이지만

그렇게라도 해야지 어쩌겠습니까

잊었다 생각했다가도

밤이면 속절없이 돋아나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천 근의 무게로 압박해 오는 그대여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당신을 가두고 풀어주는

내 마음감옥을 아시는지요?

잠시 스쳐 간 그대로 인해

나는 더 얼마나 흔들려야 하는지

추억이라 이름 붙인 것들은

그것이 다시는 올 수 없는 까닭이겠지만

밤길을 걸으며 나는 일부러

그것들을 차례차례 재현해 봅니다.

그렇듯 삶이란 것은

내가 그리워한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하나 맞이했다가 떠나보내는 세월 같은 것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만 남아

떠난 사람의 마지막 눈빛을 언제까지나 떠올리다

쓸쓸히 돌아서는 발자국 같은 것

그대여 그립다는 말을 아십니까?

그 눈물겨운 흔들림을 아십니까     




<바람 속을 걷는 법 5>

이제야 알겠다. 바람이 분다고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다리는 이에게 바람은 더 드세게

몰아닥칠 뿐이라는 것을.

바람이 분다는 것은

헤쳐 나가라는 뜻이다.

살다 보니 바람이 아닌 게 없더라.

내 걸어온 모든 길이 바람길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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