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작품들 중에는 같은 대상을 화가가 여러 번 그린 경우가 있다. 같은 제목이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 제목 끝에 숫자를 표기한다. 판화의 경우는 전체 몇 번을 찍었는지, 그중에서 몇 번째 찍힌 판화인지 분수처럼 표시한다. 123/500이라고 표시했다면 500번 찍었는데 그중에서 123번째 찍힌 작품이라는 것이다. 시인들 중에도 같은 제목으로 몇 편의 시를 연거푸 발표하는 이가 있다. 그때도 제목 뒤에 숫자를 붙인다. 오래전에 이정하 시인의 <바람 속을 걷는 법>이라는 시를 알게 되었다. 모두 다섯 편이었는데 어느 시든지 다 괜찮았다.
<바람 속을 걷는 법 1>
바람이 불었다.
나는 비틀거렸고
함께 걸어주는 이가 그리웠다.
<바람 속을 걷는 법 2>
바람 불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아니다.
그래. 산다는 것은
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바람이 약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바람 속을 헤쳐 나가는 것이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것
바람이 드셀수록 왜 연이 높이 나는지
<바람 속을 걷는 법 3>
이른 아침, 냇가에 나가
흔들리는 풀꽃들을 보라
왜 흔들리는지, 하고많은 꽃들 중에
하필이면 왜 풀꽃으로 피어났는지
누구도 묻지 않고
다들 제자리에 서 있다.
이름조차 없지만 꽃필 땐
흐드러지게 핀다.
눈길 한번 안 주기에
내 멋대로, 내가 바로 세상의 중심
당당하게 핀다.
<바람 속을 걷는 법 4>
그대여, 그립다는 말을 아십니까?
그 눈물겨운 흔들림을 아십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집 밖을 나섰습니다.
마땅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걷기라도 해야지 어쩌겠습니까?
함께 걸었던 길을 혼자서 걷는 것은
세상 무엇보다 싫었던 일이지만
그렇게라도 해야지 어쩌겠습니까
잊었다 생각했다가도
밤이면 속절없이 돋아나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천 근의 무게로 압박해 오는 그대여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당신을 가두고 풀어주는
내 마음감옥을 아시는지요?
잠시 스쳐 간 그대로 인해
나는 더 얼마나 흔들려야 하는지
추억이라 이름 붙인 것들은
그것이 다시는 올 수 없는 까닭이겠지만
밤길을 걸으며 나는 일부러
그것들을 차례차례 재현해 봅니다.
그렇듯 삶이란 것은
내가 그리워한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하나 맞이했다가 떠나보내는 세월 같은 것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만 남아
떠난 사람의 마지막 눈빛을 언제까지나 떠올리다
쓸쓸히 돌아서는 발자국 같은 것
그대여 그립다는 말을 아십니까?
그 눈물겨운 흔들림을 아십니까
<바람 속을 걷는 법 5>
이제야 알겠다. 바람이 분다고
기다리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다리는 이에게 바람은 더 드세게
몰아닥칠 뿐이라는 것을.
바람이 분다는 것은
헤쳐 나가라는 뜻이다.
살다 보니 바람이 아닌 게 없더라.
내 걸어온 모든 길이 바람길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