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늑한 서재 Nov 16. 2021

무작정 작업실을 빌렸습니다.

'무명작_까'라도 사무실은 필요하다. 


무명작_까 김파초의 책상



일주일 전, 창문 없는 작업실에 저를 밀어 넣었습니다. 보증금 25만 원에 월세 25만 원. 최소 이용기간 2개월. 딱 두 달 이용할 작정으로 왔습니다.  


12월 말이면 토끼, 너구리 녀석의 방학이 시작되거든요. 그때가 되면 작업실 생활 멈추고 집에서 머물 생각입니다. 


프리랜서 스토리 작가로 오래전부터 사무실 없이 일하는 유목민 생활을 이어왔지만 코로나를 겪으며 사무실의 필요성을 더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아이들과 남편이 방 3개를 차지하고 온라인 수업과 재택근무를 이어갈 때 저는 거실 책상이나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있곤 했어요. 


그러다 마감 지옥이 닥치면 동네 프랜차이즈 카페로 도망을 갔습니다. 원래 집은 제 일터였는데 가족들에게 사무실을 다 뺏기고, 끼니 챙기느라 싱크대 앞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안 그래도 무명작가인데 지난 1년 반은 아예 일을 할 수가 없더라고요. 통장은 물론 텅장이 되었고, 안 그래도 먼지 같은 자존감은 코로나, 불경기라는 바람에 실려 다 날아가 버릴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키우며 일주일에 몇 번 아이들과 책 수업을 하고, 웹소설을 쓰며 먹고 살아왔습니다. 그 전에는 공중파 라디오에서 7년 동안 구성작가로 일했어요.  어찌저찌 15년 넘게 작가라고 불리긴 했는데, 겉만 그럴싸할 뿐 그다지 맛있는 열매를 맺지는 못한 듯 합니다. 


십수 년 전에 매절로 (인세가 아니라 권당 일시불로 지급하는 방식) 기획 책 한 권 내고는 방송일에 치이다 결혼을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내 글을 써볼까 하던 시기에 토끼가 태어났고요. 밥 먹고 살기 위해 다시 방송일을 하다 너구리가 찾아와 저는 아이들과의 시간에 푹 빠져 살게 되었어요. 


아이 둘 어린이집, 유치원에 맡기고 부랴부랴 일을 찾아 나섰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책 수업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로맨스 소설을 썼어요. 지역 글쓰기 모임에서 단편소설을 썼는데 '으른들의 사랑'이야기에 우리 회원님들의 반응이 폭발적이더라고요. 그 반응을 딱 잡아 방향을 로맨스 소설로 틀어 초고를 완성했습니다. 괜찮아 보이는 출판사에 투고를 했고 바로 계약이 되었어요. 


그래서 8년 전쯤 첫 단행본 웹소설을 출간했습니다. 그 뒤로도 8편을 출간했고요. 동양풍 로맨스, 현대 로맨스, 판타지 로맨스 다양하게 시도해 보았네요. 


그러나 저는 여전히 중고 신인입니다. 무명작가인 것은 마찬가지고요. 게다가 이틀 전, 아홉 번째 차기작 시놉은 담당 편집자로부터 완곡하게 까였습니다. 점점 트렌드를 따라가는 게 벅차게 느껴집니다. 틀을 깨지 못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으른들의 사랑'이야기도 전보다 더 딥하고 진하게 써야 한다는 출판사의 주문도 있었어요. 한마디로 더 자극적으로 써야 돈이 된다는 이야기였어요. '어떻게 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로 아이들과의 수업도 많이 줄였습니다. 그룹수업 대신 1:1 클리닉 수업으로 전환했어요. 새 친구들을 맞이하는 건 몇 년 후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 달, 월세 50만 원을 내고 작업실을 얻은 이유는 사실 분명합니다. '흐리멍덩해진 작가정신을 선명하게 개조한다!'라는 의지가 컸습니다. 


제게는 꼭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더는 미루면 안 되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렇지만 한 달 25만 원은 제게 있어 결코 작은 돈이 아니긴 합니다.. 우리 토끼 너구리의 학원비만으로도 치이는 현생인지라...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두 달, 하고 싶은 이야기 마음껏 쓰면서 내년, 아니 저의 다음 장을 준비해보려고 해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이야기들에 물을 적당히 붓고 열심히 손으로 치댈 거예요. 말랑한 반죽이 된 그것들을 다양하게 성형해 보고요... 그 흔적들을 브런치에 담아보려 합니다. 


파초가 작정하고 옹알이하는 곳.



이곳은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는 분들이 많은 소호사무실입니다. 각각의 방문 앞에는 커다란 박스 안에 소포들이 쌓여있고, 공용 출력 공간에서 송장들이 인쇄되어 나오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요. 택배직원의 발소리, 커다란 비닐에 옷을 싸는 소리... 문 밖에서 느껴지는 활기 속에서 저는 묵묵히 글을 반죽하고 구워갈 생각입니다. 


사실 두려움도 큽니다. 그렇지만 일단 두 달 동안 저는 쓸 작정입니다. 가능한 즐겁고 행복하게요.  


***  


덧, 새삼스럽게 사전에서 '무명작가'를 찾아보았습니다. 


무명작가 (無名作家)[무명작까] 

[명사]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 

예) 그가 지금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작가이나 그 재능으로 보아 곧 세상에 널리 알려질 것이다.


예문이 참 그럴싸하네요. ^^  제 희망사항이기도 합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