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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늑한 서재 Apr 26. 2022

프림설탕만 넣었는데 커피라고?

- 나는 커피를 프림설탕으로 시작했다. 그것도 커피가 빠진.

#프림커피의 추억


나는 커피를 프림설탕으로 시작했다. 그것도 커피가 빠진.

 

스산한 초겨울, 언 손을 호호 불며 돌아온 집. 현관문을 열자마자 거실의 훈기가 느껴졌다. 오후 네 시, 엄마는 간혹 손님과 함께였다. 이미 두 분은 인스턴트 알커피로 탄 커피를 두 잔 정도 드신 뒤였고, 은은한 설탕커피의 향이 공기 중에 떠다녔다.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하고 방에 들어가는 내게  엄마는 '프림 타줄까?' 하셨다. 우리 집에서 커피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금지였다. 이미 한참 전부터 커피를 마시고 싶었지만 억지로 먹겠다고 떼쓸 것 까진 아니었기 때문에 난 늘 '프림설탕커피'에 만족하곤 했다. 그러니까 '프림커피'는 알커피는 넣지 않지만 충분히 커피마시는 기분을 낼 수 있는 대용품이었던 셈이다.


엄마 입장에서는 초겨울, 밖에서 들어온 딸에게 눈앞의 커피는 타 줄 수 없고... 해서 따뜻한 물에 프림과 설탕을 넉넉히 탄 달달한 차를 타 주신 것 같다. 자연스럽게 난 커피보다 프림맛에 먼저 길들여졌다.


# 커피에도 감칠맛이라는 게 있을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에 탄 프림과 설탕. 실은 지금도 그 비율을 알지 못한다. 몇 번 프림과 설탕을 내 멋대로 타보긴 했지만 엄마가 타 준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내 생각보다 프림과 설탕은 더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 (엄마의 손맛은 진한 양념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애초에 프림설탕 차에 입맛이 길들여진 나는 커피에도 감칠맛이 있다고 생각한다. 프림설탕'커피'는 늘 진하고 부드러우면서 달고 고소했다. 그렇다고 느끼하지도 않았다. 첫 입부터 입에 짝 달라붙는 그 맛. 추운 겨울, 교복치마를 입고 오들오들 떠느라 지쳤던 몸은 프림설탕차 한 잔이면 피로가 싹 가셨다. 역시 피곤할 때 당과 지방만 한 게 없다.


# 프림설탕차를 마시며 듣는 사서함의 추억.


교복을 사복으로 갈아입고 빨간색의 무선전화기를 들고 있노라면 엄마가 찻잔에 탄 뽀얀 프림차를 방에 넣어주셨다.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갈 때쯤 전화기에선 좋아하는 연예인의 녹음 멘트가 흘러나왔다. 사서함을 들으며 프림커피를 마셨던 초겨울의 늦은 오후, 불투명 창을 통해 들어오는 나른한 오후 햇살이 아직도 떠오른다.

 

대학에 가면서 난 엄마의 프림커피와 졸업했다. 대신 학교 자판기 커피에 중독되었다. 200원쯤 했던 자판기 커피는 늘 진하고 달아서 짜릿했다. 더불어 그때쯤 등장한 스타벅스. 뒤따라 곳곳에 생기기 시작한 커피 전문점들이 서서히 커피 문화를 바꿔놓기 시작했다.


다양한 커피 메뉴가 등장했지만 내 입맛은 프림과 설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캐러멜 마키아토'에 한동안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커피 취향은 조금씩 서서히 변해갔다.  


사발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 아인슈페너
에스프레소 바 리사르, 호텔 안다르의 네스프레소 캡슐



#카페라테와 핸드드립, 그리고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신 지도 어느덧 20년이 넘어간다. 프림설탕차로 시작된 나의 커피 역사는 최근 '에스프레소'로 또 다른 방점을 찍고 있다.


 '커피'와 관련된 지극히 사소하고도 개인적인 역사는 누구나 갖고 있을 터. 난 프림설탕, 자판기 커피를 거쳐 마키아토로 20대 전반을 보냈다. 30대엔 라테와 핸드드립, 아메리카노와 아인슈페너를 두루두루 지나오게 됐고 지금 나의 관심사는 에스프레소로 옮겨갔다. (제발 우리 동네에도 에스프레소 바가 생겼으면 좋겠다. 옆 동네라도 얼마든지 환영이다.)


다시, 처음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어느 기차역 앞 다방이 떠오른다. 사실 프림설탕차의 기억에 엄마 지분만 있는 건 아니다. 한복을 입고 아버지 손잡고 내려갔던 시골, 기차역 앞 다방에서 아버진 까만 한약 같은 커피를 작은 스푼으로 휘휘 젓고 있었다.


열 살 밑이었던 나는 내 앞에 놓인 뽀얀 음료를 보며 망설이고 있었다. 어른들이 마시는 도자기 잔에 담긴 뽀얀 그것은 낯설기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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